임용희의 출생과 성장

임용희(任龍熙) 장로는 1923년 2월 1일 평안북도 철산군 참면 월안동 51번지, 풍천 임씨의 유교가문에 부친 임득선 씨와 모친 이성순 씨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키가 크고 건강한 그는 5살 때 동네서당에 들어간 후 1년 만에 천자문을 떼고 명심보감을 공부할 정도로 두뇌가 명석했다. 당시 공부는 붓글씨로 써서 외우고 뜻을 익히는 것이었다.

때는 1910년 8월 일본제국은 무력으로 조선을 강제로 무너뜨리고 그 해 10월에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서울에 조선총독부를 설립하여 총독의 강력한 무력통치를 강행했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조선독립만세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은 서당을 폐지하고 일본식 신식학교를 군과 도시마다 세워 강제로 입학시켰고 경의선이 개통되어 세상이 빠르게 변해 갔다.

그의 가정은 그가 6살 때 서남쪽 2킬로미터 밖 월안으로 이사했다. 그는 그곳에 있는 월안보통학교와 월안교회에 들어가 신식공부와 주일학교에 다니게 되어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알고 믿는 소년으로 주일 한번 빠짐없이 열심히 교회에 가서 기도하며 성장했다.

그의 부친은 그가 매우 영민하고 매사에 성실하고 공부에 탁월함을 보이자, 큰 기대를 하면서 그의 장래를 위해 1년 후 경의선역이 있는 차련관 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을 시켰다. 그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일본어를 배우고 글씨를 잘 쓰고 공부도 잘하여 졸업할 때까지 반장을 맡는 등 명석함으로 선생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그는 4학년 때부터 글짓기를 잘해서 문학에 관심이 많은 일본인 담임선생의 눈에 띄었다. 그는 담임선생의 개별지도를 받아 문장력이 일취월장했으며, 담임선생은 가끔 학생들 앞에서 그가 작문한 것을 직접 낭독하도록 하여 어려서부터 문학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학급아이들에게 인기가 최고였고, 특히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 남학생들의 시샘을 받은 정도였다.

1936년 그의 나이 14살 때 보통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자, 부친은 가난한 형편에서도 그를 서울로 유학보내기로 작정한다. 당시 그의 고향 면에서 서울로 유학하는 중학생은 하나 둘 있을까 말까하던 귀한 시절이었다. 조선인이 합격하기가 어렵다는 서울의 기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취직하여 봉급 많은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당시 부모들의 소원이었다.

그는 시골출신이지만 서울의 수도전기공업학교에 당당히 합격하여 입학했다. 그러나 그의 학비를 대기에도 어려운 부모에게 그의 생활비까지 의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른 새벽에 나가 신문을 배달하였으며 배달이 마치면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근면함을 보였다.

당시 중학교 교육과정이 5년제여서 그는 5년간 서울에서 고학생활을 했다. 일제가 중요하게 여긴 공업학교여서 전기 기술을 철저히 배울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문학적 관심으로 세계 명작소설들을 많이 읽었고 교지에 글을 발표하여 자기의 생각을 높이고 다듬어갔다.

1941년 그는 졸업과 동시에 지금 한전의 전신인 서선합동주식회사에 취직하자 고향 근처인 신의주지점 다사도변전소로 자원하여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의 나이 20세 때 믿음의 규수인 김태옥 씨와 결혼한 후 다사도장로교회에 입교하여 1년 후 세례를 받고 집사로 유년주일학교 부장을 겸하여 신앙생활에 열심을 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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