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빛 산보다 봄과 여름의 산을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가을 산에서 볼 수 없는 생명의 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녹음이 짙어 가는 숲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에 대한 신비감 차원을 넘어 경외감마저 일어난다. 여행을 할 때 차창 너머로 보이는 시시때때로의 자연의 빛은 도저히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생명의 빛이다.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땅 속의 생명의 힘은 참으로 놀랍다. 만일 인간의 힘으로 얼어붙은 자연을 푸르게 한다면 얼마의 에너지와 비용이 들까? 언론에서는 극심한 가뭄 때나 홍수 혹은 수확기 때에 태양의 빛의 가치와 물의 가치를 돈으로 산정해 보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자연의 힘은 인간의 능력보다 더 크고 위대하다.
그러나 얼어붙은 대지를 푸르게 하는 자연의 생명력보다 더 강하고 더 큰 힘이 그리스도인에게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소유하게 된 복음의 생명력이다. 그 생명력은 수백 년의 긴 핍박과 순교의 시대를 지나오면서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더 왕성하게 복음을 전파하게 했다. 복음 자체에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복음을 들은 사람은 복음을 전하고 싶어지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진리를 외치고 싶어진다.
교회성장 이론 가운데 자연적 교회성장이론이 있는데 이 이론은 교회의 본질은 성장이 아니라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이라는 점과 교회 자체 속에 스스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 힘이 있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성장 프로그램이 없다 하더라도 교회가 교회답다면 저절로 성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이론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왜냐하면 복음 자체 속에는 스스로 자라게 하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을 소유했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청년 속에 있는 역동적이고 다이나믹한 생명력과 꺼져 가는 말기 암환자 속에 있는 생명에는 분명히 큰 차이가 있다. 얼마 전에 어느 교회에 중고등부 표어를 본 적이 있다. 표어는 ‘세상에 무릎을 꿇지 않는 그리스도인’이었다. 우리 중고등부 시절에 일반적인 표어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였다. 이러다가 미래에는 ‘조금만 타협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어가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
며칠 전에 A국에 선교사가 와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여서 참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이야기의 주제는 당연히 선교와 복음에 관한 것이었다. 그 선교사로부터 넘쳐나는 복음의 힘을 느낄 수가 있었다. 평소에도 복음에 대한 그의 열정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 분명한 자기 소명과 복음에 대한 힘은 요즘 나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였다. 그날 밤 나는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한 채 내 속에 있는 복음의 생명력에 대한 고민을 했다.
우리 모두는 복음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력에는 큰 차이가 있다. 뜨거운 바람처럼 불어와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고 새로운 소망의 꽃을 피우게 하는 복음의 다이나믹한 생명력이 있는가 하면, 겨우 죽지 않을 만큼 숨이 붙어 있는 나약한 생명력이 있다. 복음 속에 있는 생명력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때 더욱더 강하게 나타난다. 성령의 능력을 힘 입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 생명의 힘이 더욱더 넘쳐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생명을 소유했다면 이제는 그 생명이 생명답게 여겨지는 생명력을 가졌으면 좋겠다. 복음 자체가 갖는 생명력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잠시뿐인 이 세상에서 넘치는 생명력을 발산했으면 좋겠다. 말씀을 연구하다 뜨거워지는 가슴을 누리며 외치고 싶었던 경험들이 날마다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 싶어 미칠 지경인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