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0:17~22)

예수를 믿어 구원은 받았지만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은혜로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만약에 없는 것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고 신앙생활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본문의 여리고의 맹인을 보고 진정한 신앙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여리고의 맹인은 없는 게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여리고의 맹인은 구걸하는 자였습니다. 또한 앞서가는 사람들이 그가 소리 지를 때 꾸짖는 것을 봐서는 그에게는 최소한의 인권 조차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맹인에다 거지인 그는 그야말로 불행의 표본이고 잘못 태어난 인생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그의 태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태도와 사뭇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없는 것만을 바라보고 포기하고 주저 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리고의 맹인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훌륭하게 사용하는 강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볼 수 없는 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볼 수 없는 눈 때문에 불편했지만 볼 수 없는 눈 때문에 ‘보아야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맹인은 있는 귀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무리가 지나감을 들었습니다’, 또한 ‘지금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누구나 귀가 있지만 들어야 할 소리를 못 듣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죄악의 소리에 오히려 민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그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듣는 사람이 있고, 그냥 교훈으로 지나가는 바람소리처럼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반응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도 들었지만, 이 맹인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들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맹인은 귀로 들은 그 소리를 생명의 기회로 잡았습니다.

세 번째로 여리고의 맹인은 입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맹인은 자신의 입으로 소리 질러 예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여기 모인 무리들에게도 모두 입이 있었지만 그 입은 그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리는 입이었고 절박하게 소리 지르는 맹인을 향해 꾸짖는 입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리고의 맹인은 예수님은 나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믿었기에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의 소리를 들으시고,  눈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리고의 맹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맹인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여리고의 맹인은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여러분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남들과 비교하여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사람마다 있고, 없고의 차이는 있습니다. 없는 것만 바라보며 불평하거나 낙심하지 맙시다. 오히려 있는 것을 가지고 여리고의 맹인처럼 주님을 만나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 할 줄 알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의지하는 자를 만나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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