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약 목사님들이 설교하면서 ‘모범을 보여야 하는 지도층이 막말하는 일이 없도록 기도합시다’라고 하면 모두 부끄러워 자숙하지 않을까.”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9일 기독교 지도자들과의 오찬예배에서 들려준 말이라는 보도다. 그 보도에 어느 젊은 목사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뱉었다. “어르신들만 같이 자리했을텐데 설교 한 번 제대로들 들으셨네.”

▨… 박근혜 대통령이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들려준 ‘설교’가 정확한 기록에 의해 보도되었는지, 대통령의 의중이 곡해되어져 전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흔히 누군가에게 교훈하며 지시하려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 설교하려 드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박근혜 대통령의 설교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것을 교화시키는 권면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그런 부탁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 젊은 목사도 설교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몰라서 그렇게 내뱉은 것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한 반감적 또는 부정적 정서가 그 젊은 목사의 마음을 뒤틀리게 한 결과일 것이다. 목회의 길을 가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그 한 번의 설교를 위해서 목회 사역자들이 얼마나 많이 무릎 꿇으며 아파하는 가를 짐작이라도 한다면 선생이 학생을 타이르는 차원과 설교가 같은 선상에서 이해될 수는 없을 것이다.

▨… 설교는 연설이나 강연이 아니다. 코미디언의 개그나 정치가의 사자후, 선생의 훈계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팔머(C.Palmer, 1811-1875)의 정의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인류에게 일찍이 나타났고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구원을, 산 증거를 통하여 받아들이도록 제시하는 일이다.” 이 정의가 목회자들을 스스로 자문하게 만든다. 설교는 어쩌면 영원한 불가능에의 도전은 아닐까라고….

▨… 이 불가능에의 도전 앞에 선 설교자들을 바르트(K.Barth)는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목사(신학자)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시지프스처럼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것에의 도전일지도 모르는 몸부림을 소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목회자에의 길을 “설교하고 있네”식으로 폄훼하지 말라. 그것은 부르심에 대한 모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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