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 : 4, 5)
히브리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난 운명을 거슬러 애굽의 왕족으로 자랐지. 모세라는 내 이름의 의미 그대로 난 종의 삶이라는 암울한 운명에서 건짐을 받았던 거야. 그리고 내 인생은 다시는 추락하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었어. 적어도 마음 한 켠에서 그래도 난 히브리인이라는 집단무의식을 거부할 수 없어 동족을 치는 애굽인을 살해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내 확신과는 반대로 내 인생은 다시 바닥으로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어. 이번에는 노예보다 못한 살인자며 도망자로 말이야. 바로의 추격대를 피해 도망갈 곳은 광야 밖에는 없었지. 애굽을 기억할만한 아무 것도 지니지 못한 채 빈 몸으로 들어선 광야는 목숨을 구하기 위한 잠시만의 은신처라 생각했었어. 이어 처가의 양떼나 치면서 광야를 떠돌았던 시간이 사십 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애굽의 거의 모든 흔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텅 비어버린 지 오래였지. 실패한 인생이라며 나 자신을 향했던 연민도 세월이 흐르며 사라진 지 오래였어. 날 무기력하게 만들던 패배주의와 페시미즘도 어느새 잊혔고. 눈물도 말랐고, 말도 잃었어.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무감각해졌지. 어쩌면 그것만이 나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몰라. 그것이 어느덧 나이 팔십이 된 내 자화상이었어.
그날도 여느 날처럼 양떼를 몰아 호렙산으로 향했지. 불이 붙었지만 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가 너무 신기해 다가갔어. 그 때였어.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그 소리는 고막을 타고 들려왔다기보다는 내 마음을 타고 들려왔던 것 같아. 순간 난 그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직감했어. 다른 기억은 지워졌지만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에 관해 어릴 적 들은 기억들은 어렴풋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지.
뜻밖의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내게 하나님은 그 자리가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지. 글쎄... 그 때는 몹시 겁이나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얼른 신을 벗고 얼굴을 가렸지만 사실 그곳은 양떼를 치며 수도 없이 지나던 익숙한 곳이었어.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장소였지.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곳이 거룩한 곳이라고 하셨는지, 왜 신발까지 벗으라고 하셨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
후에 애굽에 내려가 동족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온 후에야 비로소 알았어. 평범한 장소가 하나님의 임재로 거룩한 곳이 되듯 비범한 삶에서 어쩌면 평범에도 미치는 못하는 삶으로 전락한 내 인생에 하나님이 오셨다는 것을.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내 삶이 특별해졌다는 것을. 양떼를 치던 너무나 평범한 신발을 벗고 하나님의 사명의 신을 신게 하셨다는 것을 말이야.
젊은 시절 난 특별한 생을 꿈꾸었지만 이젠 달라. 하나님의 임재 없이는 결코 특별한 인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