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워터게이트 보도는 미국 언론의 승리로 기록될 뿐 아니라 언론 자유의 대표적인 예로 꼽힙니다.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던 토마스 제퍼스의 “신문이 자유롭고 모든 사람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회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안전하다”는 말은 언론의 자유가 한껏 보장된 미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언론은 흔히 “권력의 제4부”라고 불리웁니다. 그러나 이 같은 무한한 언론의 자세가 과연 정당하기만 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국익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인가에 대해 때로 반성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워터게이트 폭로만 하더라도 당시 월남전의 수렁에 빠져있는 미국으로서 끝내는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일이 적어도 정의라는 측면을 떠나서 볼 때 과연 국가에 어떤 이익을 주었는가의 의문과 반성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61년의 쿠바 망명인들에 의한 피그만 침공을 사전 보도한 사례라든지 월남전의 참상을 연일 대서특필한 따위는 결국 쿠바와 월남의 공산화라는 미국에 굴욕을 안겨준 것 밖에 없다는 뒤늦은 평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언론의 자유와 신문의 사명
이렇게 생각할 때 언론의 자유는 책임과 사명의 기본 정신 아래서만 존재함이 자명해 진다고 할 것입니다. 자유가 방종 아닌 의무이듯 언론의 자유도 같은 맥락에서 보자는 견해입니다. 아무리 언론의 자유라 해도 국익에 해를 끼치고 정치적 폭력을 휘두르며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없다. “아무리 자유라고 해서 만원극장에서 불이야!를 외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에머슨도 일찍이 “표현의 자유를 성취하는 것이 사회의 유일한 목적일 수 없으며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어떤 이론도 다른 가치들, 가령 공공질서, 정의, 평등, 도덕적 발전 등을 감안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해서 언론의 사회적 책임이 제시되고 자유롭고도 책임있는 언론이 제창되고 있으며 또한 갖가지 제도적 그리고 언론의 자율적인 통제가 가해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물론 통제가 악용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개인의 권리와 사회보호 질서유지를 위해 통제기능은 있게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은 건국 이래 신문에 대해 직접적인 군부의 검열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일본 언론은 기묘하리 만큼 권력기관과 협조를 유지하고 있으나 아무도 이들 나라를 민주국가가 아니라고 하지 않으며 이 나라들이 자유로운 신문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신문들은 1959년에 제정된 신문윤리강령을 기초로 해서 실천요강을 만들어 이를 자율적으로 준수해 나가고 있습니다.
문서선교의 금자탑으로 자리매김
교단 잡지인 활천은 1922년 11월 25일 창간 이후 그 이름대로 살아있는 샘으로 기독교나 사회적으로 볼 때도 최장수 잡지로 그 관록을 세워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활천보다 먼저 간행된 기독 잡지도 있었지만 중간에 폐간되고 중단되었으나 활천은 지금도 성결의 복음을 역사와 시대마다 새롭게 인식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전통을 가진 우리 교단에서 뒤늦게나마 교단을 대변하는 한국성결신문이 창간되었습니다. 한국성결신문의 창간에 대한 의의를 두 가지만 말씀드린다면, 첫째, 활천이란 잡지의 한계를 넘어 이 시대 성결가족의 정보에 대한 욕구를 널리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정보의 홍수시대에 부응한 센스로 창간되었다는 점이고, 둘째, 1990년 7월 2일 성결신문의 창간이 평신도들의 기도와 헌신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교단의 재정 상황이 열악한 환경에서 홍기득 장로님께서 1억 여 원을 헌금하여 그것이 씨드머니가 되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성결신문이 잊어서는 안 될 사명
우리나라 신문이 사회에 기여한 공헌은 첫째, 한성순보와 독립신문의 시대로 개화기의 생활 개혁에 목적을 두고 민중 지도와 근대화에 앞장을 섰습니다. 둘째, 일제 강점기와 자유당 시대, 독재 하에서 정론과 비판으로 민중의 대변자적 역할을 했습니다. 셋째, 60년대 이후의 신문으로 이때부터 본격적인 발전의 시대로 경제 발전에 따른 생활 문화수준의 향상에 힘입어 삶의 전반에 정보와 교양을 넘치게 공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의 물결의 저자 엘빈 토플러는 미디어의 총아라고 하는 신문이 발행부수 감소 등 그 독자를 잃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미국 영국은 물론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엘빈 토플러는 이런 원인이 단지 텔레비전의 출현에 있는 것만 아니라 미니 주간지, 격 주간물, 쇼핑 정보지, 특히 미니 잡지가 폭발적인 인기속에 발행되고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성결신문은 첫째, 그 발행의 취지에 걸맞게 성결가족들로부터 변함없이 기도와 지원을 받기 위해 독자층인 성결가족들의 바램과 요구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건전한 신앙을 앙양하고 긍정적인 보도와 대안을 제시할 줄 아는 적극적인 성의와 태도를 견지하라는 충언입니다. 둘째로, 객관적이고 정확한 보도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신뢰는 무너져 버리고 독자들의 인격적 지원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정확한 비평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문처럼 비판을 위한 비판은 대안이 부재한 소피스트의 궤변에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넷째로는 이 시대의 암울한 교회와 그 정체성의 극복을 위하여 부흥과 전도에 적극적으로 대안과 처방을 찾고 제시해 나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국성결신문은 언론의 기본적 사명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성결교회의 신학과 신앙, 특히 성결성 회복과 교회를 보호하는 본래적 목적에서 한 치도 흔들려서는 안되겠습니다. 또한 한국교회와 성결교단의 정체성과 그 한계를 어떻게든 벗어나도록 부흥과 전도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교단 발전에 실제적으로 공헌함으로 살아있는 신문이요, 교단과 성결 가족들로부터 줄곧 사랑받는 성결신문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