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39~43)

예수께서 사흘 만에 무덤 문을 열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단순히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신 게 아니고,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어 살아나셨습니다. 그대로 하늘로 승천하여 영원히 존재하실 몸으로 변화되어 살아나셨습니다. 이게 예수님 부활입니다. 고린도전서 15:23에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께 붙은 우리도 이런 복을 누릴 줄 믿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병 고침을 받고, 기적을 보느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붙잡히자 다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의 모임은 끝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무서워 도망가던 그들이 무시무시한 고통을 무서워하지 않고, 집이 불타고 쫓겨나고, 가족이 흩어지고, 심지어 죽게 되어도 모여들었나요?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으시는 주님, 죽은 뒤, 오히려 변화되어 살아나신 능력의 주님을 만나니, 손해나고 고난당하는 것이 겁나지 않고,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모였습니다.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런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부활의 예수님을 본 뒤, 제자들에게 전하자 마가복음 16장 11절에 “예수의 사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13절에도,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약속을 잊어버렸고,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주께서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셨는데, 성령님의 역사로 부활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믿어지는 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39절에서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했습니다. 누가 죽였다고요? “저희가 죽였다.”고 했습니다. 추악한 죄로 죽어가는 나를 비롯한 우리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예수님을 하늘의 보좌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시게 했습니다. 가깝게는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의 편협하고 잘못된 종교관이 예수님을 죽게 했고,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종교적 형식주의와 종교적인 기득권 지키기가 예수님을 죽음에 몰아넣었습니다.

빌라도의 정치적 계산이 예수님을 죽으시게 했습니다. 수수방관하던 대중들도 공범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여기 “저희”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죽인 것은 바로, 우리들이요, 나입니다. 죄악된 우리가 그 예수님으로 하여금 죽을 수밖에 없게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우리는 모두는 예수님을 죽으시게 한 공범입니다.

40절에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그랬습니다. “사흘 만에” 라는 것은 사흘 동안 만은 어두운 무덤의 세력에 갇혀있게 놔두셨다는 겁니다. 사흘 동안에는 악한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것처럼 보이게 그들 하는 대로 그냥 놔두셨다는 겁니다. 이 사흘 동안 인간들은 자기들이 이기고, 자기들 뜻대로 된다며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정의가 짓밟히고, 불의가 판치고, 악이 들끓고 흑암의 세력과 마귀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듯 활개를 쳐도, 하나님은 그냥 놔두고 계셨습니다. 언제까지요? 사흘 동안뿐입니다.

사흘은 인간이 자기 뜻대로 됐다 착각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간이었습니다.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그랬습니다. 3일이 지나자, 마침내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깨뜨리고 정의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아무리 육중한 돌문으로 막고, 봉인을 하고, 막강한 정예 로마군이 지켜도, 주님은 변화되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오랜 역사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41절에 보니까,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그랬습니다. 오직 증인의 사명을 사는 사람과 믿음으로 함께 식사하는 공동체에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부활의 생명과 능력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얘기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나타내주신 주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눈을 열어 나타내 보여주신 것처럼, 만나야 합니다. 만날 뿐 아니라, 경험하고 누려야 합니다. 부활이 성경에 나오는 객관적 사실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성령님을 통해 나의 부활로 체험되고 확신되고, 그 부활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시길 축원합니다.

제자들이 43절에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한 것처럼, 그걸 전하라는 겁니다. 제자의 삶을 살아간 바울 선생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부활만큼 귀하고 큰 소식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만큼 우리에게 큰 복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자랑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은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급하고 귀한 일은 생명을 살리는 겁니다.

자동차가 신호만 위반하고 속도를 좀 내고, 차로만 잘못 들어가도, 즉각 걸립니다. 벌금 내야 합니다. 그러나 차로 상관없이 휘젓고 다녀도 응원을 받는 차가 있습니다. 뭡니까? 응급환자를 태우고 경광등을 켠 채 달리는 앰뷸런스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살리는데 급한 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 앰뷸런스”의 책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죄로 죽어가는 영혼을 태우고 완전한 병원 되시는 주님께로 달려가야 하는 앰뷸런스입니다. 영혼구원 위해 전도하고, 증거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지켜주시고, 보장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목적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여기에 관심 갖고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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