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는 2013년 성결인대회 및 목사 안수식을 오는 4월 20일 충남 천안 유관순 체육관에서 갖기로 결정했다. 이번 성결인대회는 19일 성별회 및 선교대회를 시작으로 성결성 회복과 성결의 은혜를 간구하는 성결인대회와 목사 안수식 등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왜 굳이 성별회를 열려고 하는 것일까? 임원회는 성별회가 성결교회의 전통적인 고유의 집회이기 때문에 이 전통을 이어가면 성결교회의 정체성인 성결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선교 동력이 만들어진다고 확신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그리하여 필자는 차제에 성별회에 대하여 말하려고 한다.

성별회를 말하려함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 이유는 성별회가 성결교회 초기의 전통 집회여서 그만큼 오래 전에 없어졌고 그렇게 넓게 보급되지 않아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활천 초기 내용 중에서 성별회를 추적 조사해 본 적이 있으며 성별회를 오늘날 한국 교회에 널리 보급되고 있는 영성훈련과 연관시켜 연구 해 본 적도 있어 이 자리에서 언급하려 한다.

성결교회 초기 전통적 집회로서 성별회
성별회는 성결교회가 교단으로 조직되기 이전인 경성 복음전도관에서 태동이 됐다. 누구에 의해서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는 명확히 알았으면 좋겠으나 성결운동의 일환으로 성결의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이뤄진 것임은 자료를 보아 알 수 있다. 성별회는 예배나 일반집회, 순회 장막 전도 집회, 구령회, 부흥회와는 달리 특별히 모였던 성결교회 고유의 집회로, 성별회는 성결의 교리를 명백히 가르치고 성결의 은혜를 체험케 하여 성결의 복음을 널리 보급할 목적으로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결교회는 성별회의 인도자를 아무나 세우지 않았고 성결의 은혜를 체험한 자로 정하였다. 시간은 초기에는 주로 주일 오후로, 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주중 오전 10시, 저녁 7시 등으로 정하였으며, 모임은 정기적이고 규칙적이었다. 증거로는 여름철에는 방학을 했다는 점과 일정한 회원제를 두고 있었던 점이다. 참석대상은 성결을 사모하는 신자들로 정하였다. 중생만 하고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여 그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과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고도 성결의 삶을 계속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성별회는 말씀과 삶을 나누기 위한 모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진행되었다. 이 때 말씀은 주로 성결의 직접적인 말씀이거나 성결에 관한 말씀이었다. 예를 들면 믿음(히11:6), 하나님의 사랑(요14:16), 앞으로 나아가자(빌3:!2-13), 음란의 신호(호4:12), 성결하라(레11:1), 성결(레11:13-23), 문둥병(레14장), 세상 죄악의 헛된 일(호12:1) 등이었다. 이는 성경공부 형식의 나눔이라기보다 설교형식의 나눔이었던 것 같다. 다음은 삶을 나눈 일이었다. 성결의 은혜를 체험한 회원들이 모여 그동안 살아온 삶을 간증형식으로 말하였다. 그러다 보니 소그룹의 모임이 이상적이었다고 판단하여 소그룹으로 모였던 것같다. 그렇다고 소그룹 원칙으로 모인 것 같지는 않고 대형집회는 지양하였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느 모임이든지 간증하는 일은 빼놓지 않았다. 이 간증은 성결의 은혜를 체험한 사실과 성결의 삶을 산 것에 대한 간증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간증을 통하여 성결의 은혜를 체험한 신자들을 알아내게 되었고 그 신자의 수를 파악하여 기록에 남기기도 하였다. 성별회는 간증 형식으로 진행되었지만 말씀을 겸한 은혜와 삶의 나눔이었기 때문에 무질서 하거나 열광주의, 혹은 신비주의로 흐를 위험을 극복하고 건전하게 발전되어 나아갔다.

말씀 나눔과 간증을 통한 은혜 체험
이미 밝혀 알듯이 성별회는 성결의 은혜를 체험케 하는 성결교회 고유의 집회였다는 것이 특별하다. 왓손(G.D. Watson)은 “성결의 경험은 특별한 심리의 활동을 요하고야 얻는 것이다. 특별한 심리의 활동이 있으므로 성결의 은혜를 실제로 경험할 수가 있으며 파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험을 얻으려면 반드시 특별한 성별회를 요할지니…”라고 말하였다. 이는 성결교회가 초기부터 성결을 체험하는 은혜라고 가르치고 있었음과 성결의 은혜를 성별회를 통해서 체험케 하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성결교회가 성결을 체험하는 은혜로 가르친 것은 요한 웨슬리의 경험론적 신학에 근거한다. 웨슬리는 올더스케잇에서 중생의 체험을 한 뒤 런던의 패터 레인(Fetter Lane) 집회소에서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웨슬리는 체험을 강조하였고 그의 신학에 있어서 체험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체험은 감정적이거나 오관으로 느끼는 감관 혹은 직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에 인간이 참여하는 초월적 체험이다.

웨슬리는 체험을 실재와 동일시하였다. 그렇다고 체험을 성경의 권위 위에 두려하지 않고 언제나 성경의 검증을 거쳐 확인함으로서 체험을 성서의 권위 아래 두었으며 비로소 성서의 권위가 산 권위가 되게 하였다. 성결교회가 성결의 은혜를 성별회를 통하여 체험케 하려했던 의도는 여기에 근거한다.

성별회의 성과는 대단하여 놀라운 은혜의 불길을 일으켰으며 성결의 은혜가 확산 되어 갔고 나중에는 전국 각 지방으로 번져갔다. 성별회는 교단의 폐쇄와 함께 중단 되었다가 교단의 재흥과 함께 재건 되었지만 그 기세가 약했고 1950년 6·25 동란과 함께 중단 되었다.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성별회는 성결운동을 확산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성별회는 6?25동란과 더불어 사라져 그 모습을 찾을 길이 없고 성결교회는 그 훌륭한 전통을 잃어버리고 지금은 많이 잊은 상태이다. 물론 그 훌륭한 전통을 그리워하는 뜻 있는 분들이 가끔 말해 오고 있음은 부정 못할 사실이다. 그런데 총회에서 이 훌륭한 전통을 살리고자 계획하고 있다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요, 환영해 마지않는다. 기왕이면 이 훌륭한 전통이 교단적으로 살아나 교단의 성결성이 회복이 되고 선교 동력으로 이어지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갖게 된다.

성별회 진행방식의 변화를 위하여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성별회가 왜 사라졌을까? 물론 그 민족의 대 혼란기에 교단의 지도자들이 영적인 혼란을 더불어 겪었을 것이기 때문에 성별회를 챙길 마음의 겨를을 얻지 못한 것이 큰 원인일 수 있겠지만 필자가 분석한 바로는 그것 말고도 성별회 진행 방안의 빈곤에서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진행이 단조로웠다는 것이다.

성별회의 프로그램은 설교, 기도, 찬송, 그리고 간증 등으로 예배형식의 범주를 초월한 특별한 방안이 없었다. 이와 같은 이유는 성별회가 독자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일반집회 혹은 예배에 귀속되게 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총회가 성별회를 계획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성별회의 특성을 잘 살려달라는 것이다. 무턱대고 부흥회 형식으로 성결에 대한 설교를 하고 통성기도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성별회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성별회를 살려야 하는 이 절박한 교단의 목마름 앞에서 그 대안은 없는가? 필자는 성별회와 영성훈련의 접목이 그 대안 중 하나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성별회는 영성훈련과 그 성격 및 목적에 있어서 맥을 같이 한다. 성별회와 영성훈련은 그 지향하는 바가 공히 성결이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입장에서 진행되어온 영성 훈련은 그 지향하는 바가 성화, 좀 더 발전시키면 온전한 성화 즉 성결이다.

복음주의가 지향하는 영성훈련은 성령이 역사하시도록 마련하여 드리는 장이며 인간은 여기 참여하여 성결을 이루어 나간다. 성별회 역시 성령세례의 체험을 강조하는 성결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성령이 역사하시도록 인간이 마련해 드리는 장이며 인간은 여기 책임적으로 참여하여 성결을 체험케 하고 성결의 삶을 살게 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성별회가 체험을 중요시 하듯 복음주의 영성훈련 역시 초월적 체험을 중시한다. 물론 기독교 영성을 정의함에 있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필자가 정의하는 바 기독교 영성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초월적 체험을 하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구체적으로 역사현장에서 살아가게 하는 역동성이라 말할 수 있다. 영성훈련이 영적인 체험과 제자의 삶을 중시하는 면에서 성결의 은혜 체험과 성결한 삶을 강조하는 성별회는 영성훈련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영성훈련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무분별한 영성훈련은 교회를 혼란케 하고 신자들의 경건생활에 피해를 끼칠 위험이 다분히 있다. 한국성결교회는 초기부터 교회의 정체성이 뚜렷한 전통적인 신학의 기초 위에서 영성훈련을 실시했던 훌륭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필자는 그것을 성별회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성별회는 성결교회가 성결을 이루기 위해 성결 지향적으로 마련한 성결교회 특유의 영성훈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별회는 시대의 혼란과 운영방안의 빈곤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새로운 형태의 영성훈련시대를 맞은 것이다. 영성훈련은 성결 지향적이면서도 운영방안이 다양하고 사회봉사의 영역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영성훈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영성훈련의 신학적 기초가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결교회는 영성훈련의 다양한 운영방안을 성별회 진행방안으로 선별하고 채택하여 성별회를 오늘날의 영성훈련으로 재흥 발전시켜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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