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고통의 시집살이

임종순(林鍾順)은 1923년 1월 22일 전북 익산군 낭산면 용기리에서 한의사 임경옥 씨의 3남매 중 둘째로 출생했다. 당시 일제 강점기의 농민들은 일제의 수탈로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녀는 집이 한의원 덕에 비교적 여유롭게 살았다. 부모가 신자인 그녀는 어려서부터 마을의 교회를 다니며 성경을 배우고 찬송가를 즐겨 부르며 행복하게 성장했다.

그녀는 초등학교 졸업 후, 세례를 받고 주일학교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열심히 봉사했다. 특히 겨울 농한기마다 2주간 실시하는 노회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함열읍에 가서 성경을 배웠으며, 기도하는 것도 배우면서 신앙이 크게 성장했다. 그녀는 신앙의 기쁨을 누리며 “나도 전도사님들처럼 주의 종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졌다.

그녀가 17세가 되자 부모는 그의 결혼에 대해 걱정했다. 그녀는 “하나님, 저는 꼭 예수 잘 믿는 총각하고 결혼시켜 주세요”라고 기도했고 아버지께도 부탁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교회 총각들 중 사윗감을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당시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후 많은 군인을 징발했고, 또 처녀들을 군 위안부로 강제 모집하던 때여서 딸 가진 부모들은 몹시 급했다.

결국 이웃면에 사는 주씨 집안의 청년(종천)과 혼인 약속이 성립됐다. 그는 아버지께 물었다. “아버지, 신랑이 예수를 믿습니까?”, “아직 안 믿지만, 혼인하면 교회 다니기로 약속했다. 유교집안이지만 뼈대가 있는 좋은 가문이므로 네가 가서 예수를 믿게 하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는 할 수 없이 양가가 정한 날에 결혼식을 한 후, 시집으로 가마를 타고 갔다.

하지만 그의 시집살이는 보통이 아니었다. 단 하루도 행복을 느끼는 날이 없을 정도로 고된 시집살이가 계속됐다. 이른 아침부터 밤이 늦도록 집안일은 물론 논밭에 나가 바쁘게 고된 일 속에서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시집은 철저한 유교집안이어서 한 달에 한번 꼴로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느라 제사준비에 정신이 없었고,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종처럼 부렸다.

그의 친정집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딸이지만 자유를 누리며 살았는데, 며느리를 종처럼 부리는 남존여비 사상에 찌든 시집에서는 마을에 있는 교회에도 그녀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게 했다. 이것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아프고 고달프게 했다.

‘결혼하면 교회에 다니겠다’던 신랑의 약속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그녀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일에서 벗어나 방에 들어가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주여, 주여!”하고 울면서 소리쳐 기도했다. 그러면 신랑이 화가 나서 “너 나하고 예수하고, 누가 더 좋은지 택하라”고 윽박지르며, 때리기도 했다. 그는 매를 맞으며,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고 참고 참았다.

이런 모진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그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줄을 놓치지 않고 계속 기도하기에 힘썼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두 번쯤 틈을 내 몰래 마을교회에 가서 엎드리면, 통곡부터 나왔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까?”하고 실컷 울고 나면 맺힌 한이 풀리며, 마음이 평안하고 새 힘이 솟았다. “그래. 내 십자가는 내가 져야 한다!”

시집살이 5년 만에 조국이 해방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제는 시집의 친척들로부터 시험이 왔다. 결혼한 지 5년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아우성이었다. “예수 믿는 며느리가 오더니, 아들이 없어 조상의 대를 끊으려 한다”는 것이다. 유교신봉자의 가장 큰 의무가 대를 이어 조상제사를 드려야 복 받는 것인데, 아들이 없으니 복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그 소리에 그녀는 문득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생각나서,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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