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으레 남들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한다. 스스로 자기자신에게 반해버리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도 하나같이 자기에게 매혹당하고 있는 줄 알고 말이다.”(J.D. 샐린저, 호밀 밭의 파수꾼) 세상이 말세인 탓일까 아니면 하수상한 탓일까. 너남없이 자신의 몸가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만 탓하려든다. 목사라고 다를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엔 잘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 자신을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 1989명이 평창에 모였다. 생김새도, 피부도, 몸짓도 달랐지만 그 누구도 잘난 체하는 사람은 없는 모임이었다. 메달을 따든 따지 못하든 모두가 축하하고 격려했다. 지적 발달 장애인의 모임, 일러서 스페셜 올림픽, 그 폐막식에서 나경원 조직위원장은 “우리 모두가 승리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지적 장애인들이 함께 모여   더불어 사는 삶을 확인할 때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자문해보자. 한풀이에 정신줄 놓은 사람처럼 내가 옳다고 계속 티격태격하고, 교단의 중심부에 가깝게 있는 사람일수록 교단 꼴이 가관이라고 혀만 끌끌 차지 않았었는가. 어느 목사가, 교회가 평창에 가서 저들의 손 한번 잡아주었는가.

▨…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약함이라고 갈파한 루소(J.J.Rousseau)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다른 인간과 함께 살거나 교류하려는 따위의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언제부터 우리 교단이 잘난 사람이 천지인 시절을 맞게 되었는가. 다른 사람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자신의 약함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오만이 체질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 조선조의 이원익(1547-1634)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는 평생 이익을 보면 부끄럽지 않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었다”는 말을 남겼다. 목사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이원익을 뛰어넘지는 못하더라도 ‘금관자(金貫子) 서슬에 큰 기침하는’ 꼴 만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웃은 커녕 동료들에게 내밀 손마저 잘라버린 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더 늦기 전에 물어야 한다. 세상은 교회를 향한 기대를 이미 접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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