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죽교회에서의 사역과 가송교회 개척

소정교회에서는 최창규 집사를 전도인으로 세워 오전에도 예배를 인도하며 교회를 이끌어가도록 했다. 교회가 차츰 성장하고 있을 무렵, 전도인의 동생이 미죽교회 처녀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교회에 큰 시험을 가져왔다. 당시 처녀의 집안은 반상(班常)의 차별이 심하고 유교적인 인습에 젖은 완고한 문중이었다.

연애결혼을 엄하게 경계하였을 뿐더러 더욱이 신부 집안은 양반(兩班)에 속하는 가문인데 반해 신랑 집안은 상인(常人)이어서 신부 문중에서 거세게 반대했다. 그 반대를 무릅쓰고 혼인을 고집하여 여자는 문중에서 축출되었고 결혼식도 치르지 못하고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교회는 ‘연애당’이라는 거센 비난과 함께 문중과 마을의 여러 남정네들이 부인과 자녀들에게 교회에 다니지 못하게 핍박을 가하여 교인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정영화 집사는 문중들을 찾아다니면서 설득도 하고 무마도 하여 교회를 수습하려고 애를 썼다. 교회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교역자의 부임이 시급함을 인지하고 신학교를 졸업한 전도사를 담임교역자로 모셨다. 그의 목회활동으로 교회가 안정되고 부흥 성장되어 갈 무렵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공산주의자들과 인민군이 자주 교회를 들락거리며 여러 가지 상황을 적어가며 교회를 감시했다.

때로는 인민군장교가 총을 들고 찾아와 교회 간판을 보고 흥분하여 세상이 바뀌었는데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간판을 떼지 않고 걸어 놓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지기도 했다. ‘대한’이라는 글자가 거슬렀던 것이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단체의 명칭이기 때문에 그대로 걸어놓은 것이고 단체의 명칭이 바뀌면 즉시 바꿔 달겠다고 대답하여 인민군 장교를 무마시켜 보냈다. 

정 집사는 교회의 안위와 교역자를 위해 기도를 쉬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은 6·25 전쟁의 전세가 공산군에게 불리해지면서 교회 전도사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김 전도사는 칠판에 “세상 나라들은 멸망 받으나 예수교회 영영 왕성하리라”는 도전적인 글을 남기고 산으로 피신했다. 그 글을 본 공산당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산을 휘저어 다녔다.

큰 나무나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마다 작대기를 휘두르며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김 전도사는 큰 나무 밑이 위험한 것임을 알고 작은 나무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기도하는데 발등에서 불이 번쩍 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가 발등을 밟고 지나가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정 집사도 공산당의 숙청의 대상이었지만 학살만행 예정일 사흘 전에 국군이 진격하여 화를 면했다. 정 집사는 텅 빈 교회에서 기도하며 지키고 있었다. 공산군이 물러가고 수복이 되자 교회에 대한 인식이 좋아져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마을 주민들도 교회가 대형 풍금을 구입할 때에 헌금을 해주는 등 매우 협조적이었다.

미죽교회가 크게 부흥성장하자 정 집사는 자신이 거주하는 가송(佳松) 마을에 교회개척을 소원하며 오랫동안 기도하여 왔던 터라 담임목사와 의논하여 1953년 5월에 정 집사의 자택마루에서 가송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처음에는 미죽교회의 담임목사가 와서 오후에 예배를 인도했으나, 한 달 후에는 정 집사가 예배를 인도했다.

교회가 창립된 그해 7월에 십자군전도대 제2대(대장 최창도 목사)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정 집사의 안마당에 천막을 치고 복음사역을 시작했다가 장소가 비좁아 마을 옆 펑퍼짐한 야산 잔디밭으로 옮겼다. 낮에는 부대장 김병채 목사가 작은북을, 최사철 장로(후에 목사)는 큰북을 치면서 동네공동우물가와 골목길과 집을 찾아다니며 전도했다.

저녁 전도 집회에 천안성결교회의 집사이며 천안중학교와 천안농업고등학교 음악교사인 이중태 집사(후에 목사)가 중고등학교 브라스밴드부를 인솔해 왔다. 브라스밴드가 연주되자 인산인해를 이루고 우렁찬 연주로 마을은 온통 축제분위기로 변했다. 최창도 목사는 운집한 대중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낮에 십자군전도대원에게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 저녁집회에 참석하여 결신하는 사람이 많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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