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산곡감리교회 개척
백마장 마을은 지금의 인천 산곡동으로서 당시 일본 육군조병창에 근무하는 한국인사원 사택이었다. 큰아들이 백마장 사택의 바깥채에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안채에 사는 사람의 갓난아이가 병이 들어 무당을 찾아갔다.
무당은 바깥채에 이사 온 갓난아기의 삼신할머니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안채의 갓난아기의 삼신할머니가 당하지 못해 병이 들어 생명이 위험하다는 점괘를 내었다. 큰아들은 난처하게 되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직장동료들이 무당을 찾아가 항의하여 무당이 사는 공장사택 안채로 이사했고 무당 가정은 공장의 종사자가 없기 때문에 바깥채에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 안채에 사는 무당은 정 집사를 쳐다보는 것조차 무서워서 슬슬 피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정 집사가 한낮 비몽사몽간에 젊은 두 여인이 대문을 열고 안채로 들어가려다가 정 집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멈칫 서서 들어오지 못하고 자기네들끼리 서로 먼저 들어가라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도망쳐버리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있은 며칠 후에 조병창 사원이 아닌 가족은 사택에서 퇴거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자연스럽게 무당은 퇴거하여 안채도 차지하게 되었다.
정 집사는 마을에서 4㎞밖 부평역 뒤에 부평감리교회에서 속장으로 임명이 되어 봉사했다. 금요일 저녁에는 인근에 거주하는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일본 순경이 찬송소리를 듣고 찾아와 창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른다. 소란스러우니 조용히 하고 미군비행기가 날아와서 공습을 할지 모르니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게 창문을 가려 등화관제를 하라고 호령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이어오다가 8·15해방을 맞이했다.
정 집사는 그가 거주하는 백마장 마을에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장소를 물색했다. 마을 근처에는 일본 육군 조병창에서 사용하던 적산건물이 많았다. 일본이 패망하여 물러간 후 빈 건물이 많았는데, 교회당으로 개조하면 좋을 건물이 있었다. 적산건물을 사용하려면 부평에 주둔한 미군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미군에게 교섭하면 교회당으로 쓸 만한 건물을 구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미군부대에 통역으로 근무하는 이웃집 젊은이에게 교회설립을 위해 미군 장교의 면담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정 집사는 미군 행정장교의 면담이 이뤄져 크리스천임을 알리자 미군 행정장교는 자신도 크리스천이라고 하며 무척 반가워했다. 정 집사는 적산건물 하나를 교회당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미군장교는 군용 지프차에 정 집사와 통역관을 태우고 건물을 답사한 후 서류를 제출하면 연구검토 해보겠다고 약속했다. 건물사용 승인청원서를 접수시켰더니 얼마 후에 미군당국으로부터 일본 육군 조병창 기술양성소 건물을 교회로 사용해도 좋다는 통지가 전해왔다.
사용 승낙을 얻어낸 정 집사는 신자들을 불러 모아 그곳에 성결교회를 세우자고 하였다. 그러나 장로교회 신자는 장로교회를, 감리교회 신자는 감리교회를 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부평감리교회의 남궁 목사를 담임으로 모시기로 하고 그 목사의 소속에 따라 감리교를 세웠다. 그리하여 인천산곡감리교회가 창립되었다.
8·15해방 후 남편을 따라 천안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소정교회의 지교회인 미죽교회에서 봉사했다. 미죽교회에는 소정교회 담임목사가 오후에 와서 예배를 인도하는 약세교회였다. 개척정신이 강한 정 집사는 미자립교회를 택한 것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