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의 흰옷을 받고

정영화 집사는 슬하에 6남매를 두었으나 그 가운데 2남 1녀를 잃고 실의에 빠져 종교를 통해 극복하려 했다. 본래 유교적인 가문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유교를 숭상했었지만, 가난에 찌들고 자녀를 잃게 되고 농토가 유실되어 삶의 기반이 흔들리자 한때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거나 북두칠성에게 치성을 하는 등 미신과 잡신을 섬기다가 어느 여승의 권고로 불교를 숭상하여 열심히 절에 다니며 불공을 했다.

그녀는 1938년에 충남 천안시 풍세면 가송마을로 이주한 후 세 살  막내 아들이 홍역으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당했다. 그녀가 막내를 잃고 깊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소정성결교회 이일백 전도사가 전도했고 그녀는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소정교회는 그가 사는 마을에서 2㎞의 거리에 있고 밤에는 가끔 늑대가 출몰하는 고개를 두 개 넘어야했다. 그렇지만 정 집사는 위험스런 고갯길을 넘어 새벽이나 깜깜한 밤, 소정교회의 새벽기도와 저녁예배를 거르지 않는 등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1941년에 집사로 임명된 그녀는 부인회 부회장에 선임되어 열심히 교회를 위해 봉사했다. 이일백 전도사가 소천하기 며칠 전 그녀는 전도사로부터 혈흔(血痕)이 묻은 흰옷을 선물로 받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을 마음에 간직하고 주님을 위해 헌신한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교회봉사에 임했다.

작은 아들이 여섯 살 때였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는데 심한 감기가 재발하여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하여 각별하게 몸조심을 해야 할 때였다. 그런데 그녀가 온종일 찾아다녀도 찾을 수 없었고 아무도 작은아들의 행방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온종일 가슴을 졸이고 있는데 해질녘에 작은아들이 지쳐 돌아왔다. 큰 아이들을 따라서 서커스를 구경하려고 20리가 넘는 천안을 다녀왔다는 것이다. 입장료는 밤중에 아버지 돈을 훔쳐내어 마련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회초리로 종아리가 붓도록 매를 때렸다.

한 밤중 작은아들의 잠결에 어머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작은아들이 잠결에 흐느껴 우니까 기도하던 정 집사가 작은아들의 종아리를 어루만지면서 기도했다. 그리고 잠을 깬 작은아들을 끌어 앉고 “종무야, 엄마가 잘못했다. 너무 많이 때려서 얼마나 아프냐? 이 다음에 네가 무엇을 하고 싶거나 갖고 싶을 때 엄마에게 말하면 내가 돈을 줄 터이니 다시는 몰래 하지 말아라”, “엄마 잘못했어요.” 모자는 서로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정 집사는 아들로 하여금 참다운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이뤄진다는 것을 깨닫게 했던 것이다.

1943년에 성결교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당하자 정 집사는 10㎞가 넘는 먼 거리에 있는 천안감리교회로 출석했다. 하지만 성결교회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재림 신앙을 고수하다가 일제에게 강제해산 당한 사실에 대해, 그 교회의 목사로부터 성결교회가 일본국법을 어기다가 문이 닫히는 어리석음을 범했다고 비판하며 일본국법을 잘 지켜야한다는 요지의 설교를 듣고 실망하여 천안구세군교회로 출석하기도 했다.

일본은 전쟁에 광분하여 곡식을 수확하고 젊은이들을 징병하여 전쟁터의 탄알받이로 내몰고, 장정들을 징용하여 전쟁의 강제노역을 시키고 처녀들은 정신대로 끌어가서 전쟁의 희생 제물로 몰고 갔던 것이다. 정 집사는 딸을 서둘러 출가시켜 정신대소집의 위험을 넘겼지만, 큰아들에게 남양군도로 가라는 징용통지서가 나왔다. 당시 남양군도는 치열한 격전지로서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일본군이 몰사하다시피 하는 죽음의 땅이었다. 징용소집통지서를 받은 큰아들은 마침 부평에 있는 육군조병창 사원모집시험에 합격하여 강제징용을 면하였고 온 가족이 농토는 친척에게 맡기고 부평의 조병창 사원의 사택 백마장 마을로 이주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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