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방미인 정영화 집사

정영화 집사는 1897년 7월 28일(음) 충남 성환 매곡마을에서 부친 정태영(鄭泰永)과 모친 어(魚) 씨의 2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914년 12월 충남 아산시 탕정면 신리의 이민기의 장남 이만영과 결혼했다. 1938년 기독교에 입문한 후 미죽교회와 인천산곡감리교회 개척멤버로 헌신했고, 가송교회를 개척하여 수년 동안 예배를 인도하며 교회를 이끌어갔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근면하여 부모의 가사를 도와가면서 독학으로 글공부에 열중하였다. 처음에는 글방 공부를 한 언니에게 글을 배웠으나 핀잔을 하며 머리통에 꿀밤을 주는 것이 싫어서 어깨 너머 공부로 글을 익혔다. 키로 쌀을 까불어 바닥에 겨가 쌓이면 그 위에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면서 글을 익히거나, 가느다란 막대로 땅바닥에 글씨를 써가면서 틈틈이 공부를 했다.

글을 익힌 후부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독서를 즐겼고 ‘옥루몽(玉樓夢)’ ‘구운몽(九雲夢)’ 등 고전소설을 한지에 붓으로 필사하여 책을 만들었다. 그 책은 시집올 때 가지고 와서 틈틈이 읽었고 마을의 부녀자들에게도 읽어주거나 고전 소설 이야기나 야담을 들려주었다.

그는 문장력도 있었고 특히 서간문을 잘 썼다. 당시 결혼예식 때에 신랑이 신부 댁에 혼인예식을 치르러 갈 때, 신랑의 부모가 신부의 부모에게 보내는 문안편지가 있었고 또한 딸을 시집보낼 때에 신부의 부모가 신랑의 부모에게 정중하게 문안편지를 보냈었다. 이 서신을 상장(上狀)이라고 하는데 그는 어깨너머로 배운 글로 마을의 상장을 도맡아 써줬다.

상장을 받아본 사람들은 그의 간결하면서도 뛰어난 문장력을 칭찬했다. 그는 바느질솜씨도 남달랐다. 혼인예식 때에 신랑신부가 입을 예복이나 치마저고리, 신랑의 바지저고리나 신혼 이부자리, 장례식 때에 고인에게 입히는 원삼(圓衫) 수의 등 중요한 옷을 마을에서 도맡아 지어주는 등 팔방미인이었다.

그는 원칙에 충실하며 다정다감하고 인정 많은 사랑의 실천자였다. 친척 간에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거나 분쟁이 일어나면 시비곡절을 명쾌히 가려내어 원만히 조정해줬다. 집안친척 가운데 예의범절이나 경우에 어긋나면 불호령이 떨어질 정도로 엄격했다. 손녀의 6학년 담임이 학생들을 자습시키고 주막에서 술을 즐기는 것을 알고 그 술집에 찾아가 충고해줄 정도로 직언하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정 집사는 면내에서도 교회의 대표적인 집사로 인식되어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교회의 대표로 초대되는 등 카리스마가 있었다.

정 집사는 손님대접을 좋아하여 그의 집은 행상인들의 숙소가 되기도 했다. 그 마을에 들어오는 행상은 으레 정 집사의 댁에서 유했다. 남자 행상은 사랑채에서 여자행상은 안방에서 거저먹고 유숙하였다. 방물장사, 옷감장사들이 각 지방에서 오는 낮 익은 행상들이 해마다 정기적으로 수십명씩 찾아와서 묵어갔다.

정 집사는 소화제, 청심환, 고약 등 상비약품을 장만하여 약품이 필요한 마을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여름철이면 거미를 잡아 들기름 넣어 삭혀서 연고를 만들었다. 그 연고로 웬만한 부스럼 따위는 신기할 정도로 잘 치료되었다. 마을사람들 가운데 부스럼이 생기면 거저 제공해주었다. 해방 후에는 미군부대에서 큰아들을 통해 상비약을 구해 실비로 보급해주었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무료로 제공했기 때문에 정 집사의 집은 마을의 보건소 역할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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