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장립과 그의 헌신의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되었고 그 해 9월에 성결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은 서울신학교 강당에 모여 눈물로 광복 감사와 성결교회 재흥예배를 드렸다. 함열교회도 장석초 목사의 주도로 교회 재건예배를 드렸으며 화정교회도 재건했다.

얼마 후, 장석초 목사의 권면으로 류응현 집사는 화정교회 신자들의 절대적 지지 속에 장로로 피택을 받았다. 그리고 지방회의 시취를 거쳐 마침내 1949년 7월 5일에 화정교회의 설립자인 그가 제1호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바로 그날은 화정리 마을의 큰 잔칫날이었다. 그의 전도로 마을의 30%가 신자였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이 거의 모인 큰 잔치가 되었다.

그가 장립식을 마치고 난 후, 당시 25세 된 큰아들 승규를 불렀다. “승규야, 나는 네가 주의 종이 되기를 위해 기도한다. 알았지?”, “흥, 아버지 마음대로? 나는 절대 목사가 안 되니, 그런 기도일랑 하지를 말어요.”, 아들이 이렇게 한마디를 던지고는 재빨리 강경으로 달아났다.

당시 승규는 한전 강경영업소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아들에 말에 그는 잠시 실망했지만 아들의 목회자 되기를 고대하며 기도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다. 공산군이 7월 중순에 함열까지 내려오자 정부의 탄압을 받아 숨어 살던 마을의 공산당원들이 나타나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류응현 장로가 동네에서 맨 먼저 끌려가게 되자, 27살 되는 승규가 아버지 대신 자기를 끌고 가라고 애원해서 대신 끌려갔다. 승규는 효자였다. 산에서 구덩이를 파고 좌익들의 대창에 찔려 죽을 고비에서 끌려간 승규는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마음속으로 매달려 기도했다. 끌려간 사람들 십여 명이 다 죽었지만 대창이 승규의 옆구리를 살짝 찌른 덕택에 그는 시체가 널린 구덩이 속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이 극적인 사건을 통해 승규가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다. 그동안 류응현 장로 내외가 승규의 헌신을 위해 자나 깨나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던가? 하나님의 역사적인 응답이었다.

류응현 장로가 온 재산을 다 바쳐 설립한 익산의 화정교회는 설립한지 금년 81년이 된다. 해방 후, 그가 장로가 되어 새 교역자들을 모시기 시작할 때부터 크게 부흥되어 한때는 마을 주민의 70%까지 복음화가 되었다. 그는 장남이 헌신하자, 두 형제도 헌신하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둘째 재선은 부친의 뒤를 이어 장로가 되겠다고 해서 화정교회 장로가 되었고, 막내 충신이도 처음엔 교역자 되기를 반대하다 중병으로 신음 중 회개하고 치유됨을 입어 헌신하여 목사가 되었다.

이렇게 가족과 일가친척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도와 권면으로 모두 구원을 받게 했다. 그는 이렇게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온전한 삶을 철저하게 충성하면서 살다가 1965년 9월 17일 67세로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심 받아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며 안식하고 있다.

이 작은 농촌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종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담임전도사로 시무한 홍종현 목사, 청년회 출신 이재완 목사와 주남석 목사가 총회장이 되었다. 또 화정교회 출신 중 류승규, 류기련, 서광석 목사들은 원로로 계시다가 소천했으며, 또한 최주락, 류충신 목사는 은퇴하여 명예목사로 있으며, 도길재, 류정호, 류경상, 김영철 목사 등이 현재 현역으로 충성하며 교단과 한국교회 복음화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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