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시절 봉사하던 교회에 부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셨는데, 특별한 설교 준비없이 강단에 올랐다. 성령께서 직접 말씀을 주시기 때문에 주석이나 책이 필요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날 우리들은 성령께서 그렇게 횡설수설(?) 하시는 분임을 처음 알았다.
간혹 많은 목사님들이 베뢰아식 은사론에 빠져 설교를 그릇 이해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강단에 서기만 하면 설교자가 아무 준비를 하지 않아도 성령께서 직접 말씀을 입에 넣어 주신다는 식이다. 이것은 은사로써의 설교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은사로 번역된 헬라어 카리스마는 특히 바울 서신에 집중적으로 나온다(롬 1:11; 5:15f.; 6:23; 11:29; 12:6~8; 고전 1:7; 7:7; 12:4 28:30f.; 딤전 4:14; 딤후 1:6). 롬 6:23의 경우처럼 카리스마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으로 지칭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슐츠(S. Schulz)가 분석한 것처럼 카리스마는 주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어지는 ‘은사’로 해석한다. 초대교회는 바로 이런 성령에 의해 주도되던 은사공동체였고 설교는 곧 카리스마였다.
그러나 교회가 제도화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라는 초대교회의 카리스마 개념은 인간의 타고난 재능으로까지 확대해석하게 된다. 즉 사역의 직무를 짊어지는 순간 타고난 재능은 성령의 역사를 위해 효력을 끼치는 수단이 된다고 본 것이다. 제도화의 절정을 이룬 중세교회에서는 사역의 직무가 카리스마가 아닌 영적으로(geistlich) 이해된 법(Recht)에 의해 그 정당성이 인정받는 것으로 이해했다.
사도바울이 주장했던 교회를 세우는 봉사로써의 카리스마는 중세에 이르러 법과 의무의 시스템으로 바뀌고 말았다. 만민을 신자로 가졌던 중세교회에서는 성령이 아닌 교회가 주체가 되어 교회가 필요한 인물들을 사역자로 세우게 되었고, 그 기준은 카리스마가 아닌 신학과 훈련에 의해 만들어지는 덕성과 실력이었다.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초대교회의 수직적 차원이 중세에 이르러 학문과 훈련이라는 인간적 차원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두가지는 대립의 명제가 아닌 보완과 조화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을 올바로 간파하고 카리스마로써의 설교의 개념을 제대로 정립한 인물이 마틴 루터였다. 그가 주장한 설교를 위해 하나님으로 부터 부름받았다는 내적 소명은 그 소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은사 즉 카리스마를 내포한다. 동시에 두 번째로 그가 제기한 신학교육과 안수라는 외적 소명은 하나님의 은사가 훈련되고 개발되며 교육되어야 하는 것임을 웅변하는 것이다.
루터는 소명론을 통해 주어지는 은사와 훈련되는 은사가 나뉘어 질 수 없음을 선언한 것이다. 당신이 사역자로 부름받았다면 이미 감당할 수 있는 은사가 함께 주어진 것이다. 이제 그 은사를 끄집어내어 개발하고 훈련하는 것은 당신이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