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동네에 교회를 설립한 새 신자

류응현은 동네 사람들을 하나 둘, 전도했다. 주일에 함열까지 데리고 다닌 사람들이 어른 10여명, 청소년 10여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바쁜 농번기가 되면 대개 사람들은 교회가 너무 멀다는 핑계를 대고 교회출석을 거부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동네에 교회를 세우기로 작정하고 교회에 가서 당시 함열교회의 담임 송창현 목사와 상의해 허락을 얻었다.

마침내 1931년 7월 10일 새 신자인 류응현의 가정에서 함열교회의 첫 지교회인 화정리교회의 개척예배가 드려졌다. 1920년 창립된 함열교회는 시골교회로서 자립하기 힘든 처지였지만,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그의 마음에 감동하여 지교회로 화정리교회를 개척한 것이다. 그때 그는 아직 학습이나 세례도 받지 못한 새 신자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이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심이 대단하고 열심히 전도하여 신자가 많아져 자기 안방과 마루가 좁게 되었고 새로 교회가 필요하게 됐다. 그는 10여 년 간 머슴살이로 피땀 흘려 겨우 마련한 자기의 밭 200여 평을 교회대지로 헌납했다. 그가 헌납한 대지에 동네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건축하여 1932년 11월 5일에 헌당식을 하는 등 실로 놀라움을 준 새 신자임에 틀림없었다.

그에게 이런 일화가 있다. 당시 시계가 없어서 그가 새벽기도회 종 치는 시간마다 대강 짐작하고 쳤는데 너무 일찍 쳐서 동네 사람들이 종소리 때문에 너무 이른 새벽에 깨었다. 그래서 어떤 성질이 급한 어른이 달려와 야단을 치고 주먹질을 했다. 그래서 그가 교회 종을 잘 치게 시계 하나만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새벽에 교회로 가니 부엉이 한 마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어 그를 잡아 읍내에 나가 판돈으로 시계를 구입한 적이 있다. 그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 할 것이다.

마침내 그는 함열교회에서 1933년 3월에 학습을 받았고, 그해 12월 25일 ‘성탄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낮고 천한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님을 깊이 사모, 갑자기 회개의 고백이 터져 나와 눈물을 흘리며 회개기도를 드렸다. 비로소 중생을 체험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때 일자무식인 그의 지식의 눈이 밝아지면서 옆에 앉은 신자의 한글 성경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며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기적에 일어난 것이다. 그는 즉시 성경을 사서 날마다 정성을 다해 읽으면서 감동을 주는 구절은 몇 번이나 읽으며 외웠다. 그렇게 외운 성경구절이 그의 신앙생활에 큰 버팀목이 되었고, 또 그가 설교하는데도 큰 힘이 되어주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1934년 3월에 장석초 목사에게 세례를 받아 그는 이제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또 집사로 임명되어 주일예배나 공 예배는 화정교회 신자들 모두 함열교회로 데리고 출석하게 하고, 그 대신 화정교회의 새벽기도회만은 류 집사가 기도회로 인도하도록 허락을 했다. 그는 이제 새벽마다 기도회를 인도하는 설교자가 된 것이다.

화정교회는 그의 열심과 전도로 점점 부흥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주창하는 성결교회가 국시에 위배된다며 1943년 5월에 전국 성결교회의 교직자 200여 명을 체포한 후, 그해 9월에 예배드리지 못하도록 일제히 폐쇄령을 내렸다. 화정교회도 경찰들이 와서 교회의 출입구를 봉쇄했다. 마침내 일제는 성결교회를 1943년 12월 29일부로 해산령을 발표함으로 전국 성결교회와 함께 화정교회도 해산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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