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25~33)
테오도르 허츨(Theodor Herzl)은 자신의 유대인 신분을 감추고 유럽인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존경하는 유대인이자 프랑스군 장교인 드레퓌스(Dreyfus)가 반역죄로 사형당하게 되자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형판결의 주된 이유는 반역죄라기보다는 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살 길은 국가로 독립하는 길밖에 없음을 허츨은 알고, 전 세계 유대인들을 향해 유대인의 나라를 만들자고 호소했습니다. 그의 꿈은 전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불가능해보이기만 했던 희망은 허츨이 세상을 떠난 지 44년 만에 이루어지고야 말았습니다. 그의 기다림은 희망이었고, 결국 현실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25~33절은 아기 예수님을 만난 두 사람 시므온과 안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기다림을 보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주의 백성으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살펴봅니다.
첫째 시므온과 안나는 ‘믿음과 희망’을기다렸습니다. 학자들은 시몬과 안나의 나이가 100세 혹은 적어도 90세는 넘겼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나이가 들면 희망을 노래하기보다 포기에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일을 하기 두려워 합니다. 희망보다는 절망하기가 쉽습니다. 당시 시대의 모습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버려진 민중, 아무도 위로하지 않는 민중, 밟으면 밟히고 찍으면 찍힐 수밖에 없는 그 민중에겐 그들을 대변해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간 희망의 메시지는 들려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두려울 때 이길 수 있는 용기가 되기도 하고, 현실을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등을 떠밀어주는 힘입니다. 희망은 현실의 슬픔을 이길 수 있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불러야 할 희망의 노래는 어디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 희망은 우리 가슴에서부터 터져 나와야 합니다. 교회로부터 어두움을 향한 희망의 빛은 증거되어야 합니다. 대강절은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 희망을 다시 찾게 해 주는 시간입니다.
둘째 안나와 시므온은 언제든지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도록 그들은 준비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수동형이라기보다는 능동형입니다. 메시아가 오실 것을 능동적으로 준비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메시아를 기다렸기 때문에 경건하고 진실하게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삶이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요? 진정 주님을 만나기 원하십니까? 아름다운 만남을 위하여 오늘 우리 삶을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시간과 물질, 건강을 바로 사용하고 있는지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것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적극적인 기다림입니다.
셋째 시므온과 안나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감사와 증언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나를 찾아오신 주님, 조건도 이유도 없이 찾아오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까지 사랑하셨던 그 사랑의 하나님을 만났다면 우리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경배 드리며 우리 입술을 다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지 않을까요? 성탄의 계절,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내가 찾은 복음의 소식을 증거하는 것이 진실로 구원을 맛본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본질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백성입니다. 이 땅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희망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이 있기에 또 다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희망의 약속을 다시 붙들어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오늘 내 삶을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받은 구원의 감격을 증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