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8:32~35)
교회력의 한해를 감사로 마감하며 구주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소망으로 새해를 시작합니다. 그리 즐거울 것이 많지 않던 옛적에도 아이들에게 새해는 막연한 소망이 생겨나던 때입니다. 하물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로서 성탄을 기다리며 교회력의 새해를 시작한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일 것입니다.
작년 이맘때 쯤 톰 크루즈라는 미국의 유명 배우가 영화홍보를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하였습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지만 공항에는 그를 먼발치에서나마 보려고 하는 수많은 팬들로 가득 찼습니다. 수많은 팬들이 늦은 시각까지 자기를 기다려준 것에 감동한 톰 크루즈는 몇 시간이 걸려서라도 팬들에게 일일이 인사하고 다가가서 사인을 해주었습니다. 심지어는 여성 팬들이 달려들어 기습 포옹을 해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응하곤 합니다. 팬들에게는 늦은 시각까지 기다렸던 보람이 휘갈겨 쓴 사인 한 장과 뜨거운 포옹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마 오래도록 잊지 못할 추억과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복이라고 하면 복음서에 나오는 8복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본문에서는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복이 약속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성도의 기다림은 날마다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다림의 위치는 문 곁 또는 문설주 옆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설주는 여러 모로 의미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오기 전 하나님이 애굽 땅에 내린 10번째 장자재앙이 내려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도록 하여 죽음의 재앙이 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신명기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명령하면서 그 말씀을 미간에, 손목에,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늘 가까이서 보고 기억할 수 있는 장소를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단지 그 정해진 장소에 계명의 말씀을 기록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말고 아예 그 장소에서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보면 이 얼마나 허망하고 할 일없어 보이는 모습인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이 복이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뭔가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행동하여야 어떤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도 복이 굴러들어온답니다. 사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일을 그르치는 것은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너무 앞서서 서두르기 때문일 때가 더 많습니다.
날마다 그 옆에서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라는 잠언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나에게도 그와 같은 모습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참 분주합니다. 먹고 살기에도 바쁘고 분주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모습으로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순절 기간 동안 금식하며 절제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갖듯이 대강절에도 그에 버금가는 기다림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신뢰 없이 기다리는 것은 불안과 염려만 더 키울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가득한 성도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것에서 참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기대감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연말과 겹친 대강절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이 더 분주해지고 소란해질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기다림으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만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자에게도 복이 있네요.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만약 네가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 질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질 거야. 4시가 다 되면 나는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할 거야. 그러다 우리가 만나면 넌 행복에 젖은 내 얼굴을 보게 될 거야” 주님을 기다리는 나에게도 이런 설렘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