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 소용의 짚
성서와 관련된 고고학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 중에 하나는 아마르나 문서의 발견이다. 아마르나 문서는 주전 14세기 이집트가 가나안 땅을 다스렸을 때 가나안 도시들이 이집트를 향한 요구와 불평을 기록한, 그리고 이집트가 이에 대한 답을 쓴 편지들이다.
이 문서에 등장하는 아피루 혹은 하비루는 히브리인인가 아닌가로 논쟁의 대상이 되곤 했다. 아마르나 문서의 발견은 1887년 한 이집트 농부에 의해 텔 엘-아마르나에서 발견되었는데 당시 이집트의 농부들은 쉐바크라 불리는 고대 유적지의 진흙벽돌을 캐다가 거름으로 사용했다.
이스라엘의 텔과는 달리 이집트의 텔은 유적지를 덮고 있는 진흙덩어리들에 가깝다. 고대는 물론이거니와 현대까지도 이집트에서는 오직 나일강변에만 도시들이 발전했다. 나일강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풍요와 번영을 주기도 했지만 자연적인 범람으로 인해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인해 강변에 있던 도시들이 휩쓸려가자 고대 이집트인들은 강의 범람을 막아 도시를 보호할 거대한 벽을 강변에 세웠다. 진흙벽돌을 쌓아 만든 이 벽은 강의 범람으로 무너지기도 했고 유적지가 버려졌을 때 그 위를 덮어 인공 언덕 즉 텔을 형성하게 되었다.
텔 엘-아마르나는 주전 약 1354~1336년 사이 아몬이라는 신을 섬기던 이집트의 전통에서 벗어나 아톤이라는 새로운 신을 섬기기 위해 단기간만 사용된 수도로서 아케타톤이라 불리던 장소이다. 아톤을 섬기고자 했던 아크나톤 왕이 죽고 이 도시는 버려진 채로 텔 속에 파묻혀 버렸었다. 문서를 발견한 농부 역시 이 고대 진흙 덩어리를 파다가 설형문자로 기록된 문서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진흙벽돌이 질 좋은 거름으로 사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벽돌을 만들 때 짚이나 동물의 변, 털, 조개 혹은 모래 같은 다양한 첨가물들을 넣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벽돌의 모습은 우리에게 이집트의 라암셋과 비돔 건설에 참여했던 이스라엘 민족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비돔을 비롯한 이집트의 여러 유적지에서는 짚을 넣어 만든 벽돌들로 쌓아 만든 벽들이 발견된 바 있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 나가 여호와께 절기를 지키도록 해 줄 것을 요구했을 때 이집트의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시는 벽돌 소용의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로 가서 스스로 줍게 하라…”고 명령하여 노역을 더욱 더 무겁게 하였다(출애굽기 5:7~8). 시날 땅의 벽돌은 가마에 구워진 것에 반해(창세기 11:2~4) 이집트의 벽돌은 태양열에 자연스럽게 말렸기 때문에 진흙이 벽돌의 형태로 유지되기가 힘들다.
진흙에 짚 같은 첨가물들을 섞으면 진흙은 좀 더 찰져지고 서로 엉겨 붙어 접착력이 강해지기 때문에 태양열에 말려도 갈라지지 않고 벽돌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 짚을 주지 않고 수효를 똑같이 채우라는 말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짚은 사실 귀중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겪었던 사건처럼 짚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벽돌의 수효가 달라질 수 있는, 또한 노역의 수고가 더 무거워질 수 있는 결정적인 사건을 제공할 수도 있다. 과장되기는 하지만 짚이 들어가 있는 진흙덩어리를 가져다 거름으로 사용하려했던 농부는 잊혀진 도시와 왕 그리고 그의 문서들을 발견하는 세기의 발굴을 하기도 했다. 기독인의 생활은 이 진흙벽돌의 짚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과 교회라는 진흙덩어리를 좀 더 찰지게 하고 서로 엉겨 붙어 하나의 단단한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 기독인의 의무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