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성장과 고된 머슴 생활

류응현(柳應鉉)은 조선 말 한반도 격동의 시기요, 20세기가 시작되기 불과 이틀 전인 1899년 12월 30일, 문화 류(柳)씨 충경공 제31대 자손으로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칠목리(일명 화정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가정이 그러했듯이 그의 집은 조상 때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온 유교집안이었다. 몇 대 조상까지는 벼슬을 하며 잘 살았다는데 고조부께서 당파싸움에 휘몰려 유배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후, 가세가 급격히 기운 몰락한 가문 중 하나였다. 그의 집은 밭 몇 때기 농사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일 년에 몇 차례 조상 제사 때가 되면 빚을 내서라도 제사를 드리느라 늘 살림살이가 궁핍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도 그의 부친은 옛 양반의 체면 때문에 남들처럼 바쁜 농사철에 남의 일을 해주고 삯을 받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다.

그의 어린 친구들 중에 여유가 있는 가정의 아이들은 6살이 되자, 마을 서당에 가서 훈장에게 천자문을 배웠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매달 서당에 줄 돈이나 곡식이 없어서 그와 그의 형을 서당에 보낼 수가 없었고 그는 서당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자격지심을 느끼며 외롭고 기가 죽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형은 아버지를 닮아 일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응현은 무슨 일이든지 손에 붙잡고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이 10살 때부터 그는 동네 부자 집 아저씨의 눈에 들어 매일 아침 찾아가서 잔심부름을 도왔다. 밥을 먹을 때 푸짐한 음식을 일꾼들과 함께 먹으니 밥맛도 좋고 기운이 절로 나는 것 같았다. 양반 체면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굶거나 부실한 음식을 먹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1910년 8월,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조선이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겼다. 그의 나이 12살 때였다. 함열읍에 나가면 관공서에서 일본 사람들이 일하고 일본 깃발이 나부꼈다. 얼마 후에 형과 그에게 면에서 취학통지서가 왔지만, 그 나이에 초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한다는 것과 매월 월사금을 낸다는 것이 힘에 겨워 아버지가 거절했다. 그래서 그의 형제는 집이 너무 가난해서 한문도, 한글도, 일본글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모두 잃어버렸다.

그는 15살이 되자 부자 집에 머슴으로 자진해서 들어갔다. 그 때 아버지가 깊은 병중에 계셨기 때문에 어머니께만 말씀 드려 양해를 구했다. 형에게 함께 머슴살이해서 부모를 봉양하자고 했으나 형은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머슴살이는 안 한다고 잡아뗐다. 그는 주인이나 청지기가 시키는 일은 닥치는 대로 열심히 했다. 어린 나이에 머슴살이가 힘들고 어려웠지만 일자무식한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은 이것밖에 없는 것을 그는 알았기 때문에 열심히 했다.

연말이면 그는 주인이 주는 세경을 받았다. 그것은 일본 돈 30원과 곡식 두 말이었다. 아직 어려서 어른의 몫이 아니었지만 난생 처음으로 일을 해주고 받은 삯이어서 너무 신났다. 그는 그 돈을 어머니께 드렸더니 어머니가 눈물을 흘렸고, 그해 설날은 처음으로 온 가족이 남들처럼 풍족한 음식으로 잘 지낼 수 있었다. 그의 꿈 많은 청소년 시절은 이렇게 힘겨운 노동생활, 머슴생활로 자꾸만 흘러만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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