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대한 신앙공동체의 기억은 출애굽에서 시작된다. 구원의 감격과 광야에서의 생활을 잊지 않기 위해 하나님은 초막절을 지정해 주셨다(레 23:43). 이 초막절에서는 아무 노동도 하지 않는다. 대신에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데, 토지의 소산을 드리고 나누는 축제를 벌인다(레 23:39~40, 신 16:13~14).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여기서부터 찾을 수 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신대륙으로 건너간 후 정착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풍랑과 식량난 속에서 바다를 건넜고, 첫 해 동안 44명이 숨졌다. 인원이 줄어드는 것은 인디언의 위험에 더욱 약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가족의 죽음과 인디언의 위험 속에서도 청교도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잊지 않았다. 비록 작은 소출이지만 감사예배를 드렸고, 인디언을 초청해서 함께 나누었다. 이 때 칠면조를 잡아 나눠 먹었는데, 이것이 추수감사절에 칠면조 고기를 먹는 유래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추수감사절은 아니지만 추석이라는 명절이 있다. 첫 나락을 벨 무렵 첫 곡식으로 조상께 감사하고, 온 친지와 마을 공동체가 축제를 벌이는 날이다. 지금은 온 가족이 모이는 몇 안 되는 연중행사로 전락해 가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있다.

이러한 전통과 문화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추수감사절은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절기이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소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신앙공동체가 소외됨 없이 함께 나누는 것이 추수감사절이다.

추수감사주일을 맞는다. 온갖 곡식과 과일들이 풍성하고 아름답게 강단을 장식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강단의 모습이 알곡 없는 나락의 모습처럼 보인다. 단지 손수 지은 농산물이 아니라, 많은 재정을 들여서 인위적으로 꾸민 모습이 그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도시교회는 추수와는 관련이 없다. 물론 회사를 다니건 사업을 하건 하나님이 거두게 하신 것이 다양하기 때문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절기에 상당한 헌금이 들어오기 때문에, 강단에 곡식과 과일로 화려하게 채우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가 있다.

이미 많은 교회가 추수감사절 준비를 마쳤겠지만, 추수감사절에 강단과 추수감사절 봉투를 준비하는 것 이외에 좀 더 생각하면 많고 또 의미가 있는 것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추수감사절 강단에 쓰이는 농산물은 농촌교회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미리 계약하여 준비하는 것이다. 만약 첫 나락을 농촌교회를 통해서 구입하여 강단에 올리거나, 비록 못생겼지만 직접 농촌 성도들이 딴 호박이나 고구마, 과일들로 강단을 장식한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며, 농촌교회 선교적 의미도 담겨 있다.

둘째로 설교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에 초점을 맞추는 것뿐만 아니라, 나락 한 알도 생명을 담아 키우시는 하나님 혹은 땅에서 난 곡식으로 모든 생명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 역경 속에서도 감사를 잊지 않고 나누게 하시는 하나님 등 구원론적, 생태신학적, 공동체적 차원에서 설교하는 것이다. 한 해의 소출을 거두며 공동체가 나누는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살리는 설교가 많이 행하여지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추수감사절예배는 헌금봉투로서 감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 속에서 나오는 감사를 예배순서 안에 넣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감사를 나누고 하나님께 드리며, 신앙공동체가 모두 참여하는 예배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본 교단 농촌목회자회는 추수감사절 예배 예식서를 제안한다. 농촌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이기 때문에 비록 투박하게 만들어 졌지만, 추수감사절을 성서적인 의미로 지내기를 바라는 목회자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지금 한국 사회는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에 있고, 교회는 그 안에서 그 모든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모든 교회들에게 넉넉한 소출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감사와 나눔이 넘치는 추수감사절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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