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권위, 설교자의 권위
지난 100년간 출판된 설교학 관련 책 중 가장 논쟁적인 작품은 아마도 1971년 발간된 프레드 크래독의 『권위 없는 자처럼』일 것이다. 리처드 에슬링거는 이 책이 설교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고 평가하는데, 그 이유는 크래독이 이 책을 통해 설교의 중심축을 설교자에서 청중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크래독은 1960년대를 돌아보며 미국에서 “더 이상 설교자들은 성직자로서의 권위와 직제에 대한 권위, 혹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전제할 수 없게 되었다”며 교회 내 권위주의를 넘어서 민주적인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를 정립할 것을 주장했다. 따라서 “청중은 설교자가 제시하는 결론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메시지를 통해 자기 자신들이 내리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며, 그럴 능력이 있다고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크래독은 청중이 설교에 참여하는 것은 필수이며 청중에 의해 설교가 완성되는 것이기에, 설교는 설교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설교자와 청중이 동등한 파트너로서 함께 만들어가는 해석학적인 여정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설교자의 명제를 설득시키기 위한 독백형태의 전통적인 설교에서 청중의 말씀 경험을 위한 대화적인 설교의 전환을 주문했다.
이런 주장은 많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마치 천동설을 주장하던 중세 교회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처럼 설교의 무게중심을 설교자에서 청중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설교의 권위를 훼손하는 불경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설교자들에게 권위 없는 자가 되라는 주장은 1960년대 급진적인 사회변화 속에 흔들리던 미국 설교자들의 권위에 직격탄을 날리는 것처럼 들렸다.
청중에 대한 과도한 신뢰와 낙관적인 기대를 품는 것은 아닌지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하고, 설교자의 권위가 약화되는데 과연 설교가 제대로 될까 하는 불안이 공유되었다. 청중의 입맛에 맞는 설교만 해야 해서 진리의 말씀을 전하지 못할 수 있다는 걱정도 있었다.
이러한 비판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크래독의 주장이 상당부분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대중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본산으로 수평적이고 탈권위주의적 관계를 지향하는 미국 사회의 에토스와 크래독이 주장하는 설교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잘 맞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교 문화가 익숙한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은 크래독의 권위 없는 설교자 이미지에 거부감을 강하게 표시한다. 그들의 불안과 우려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필자는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설교자의 권위를 이해하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화 이후 성장한 젊은 성도들은 설교자의 권위만이 아니라 연장자의 권위, 남성의 권위와 같이 교회내 자리잡은 전통적인 권위주의 문화에 동의하지 않으며 저항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인정한다고해도, 설교자가 권위를 잃어버리면 설교도 말씀으로서 권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설교의 권위와 설교자의 권위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권위는 인정받는 것이지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메신저가 권위가 있으면 메시지에도 권위가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메신저의 권위가 없더라도 메시지 자체에 권위가 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설교자가 유명하지도 않고 강력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설교 자체가 설득력을 가지면 설교가 권위있는 말씀으로 전달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권위있게 말씀을 전하신 방법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의 본체를 숨기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여 나사렛 출신 마리아의 아들 목수로 세상에 나타나셨다. 흠모할만한 것이 없는, 권위 없는 자로 오셨다.
그러나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 그러므로 설교와 설교자의 참된 권위는 설교자의 화려한 배경이 아니라 그가 전하는 말씀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