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색옷을 벗기지 말자
최근 뉴스는 온통 대통령 후보들에 관련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보다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시장에서 물건을 팔기도 하고 노숙자들과 식사를 하기도 하는 등 무던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들 중 누가 더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인지 혹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그들 스스로 뿐만 아니라 나라 곳곳에서 서로 논쟁하고, 질투하고, 비방하고 있다. 대선의 뚜껑이 열릴 때 그들 중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자는 대통령이라는 값비싼 옷을 입게 될 것이다.
성서에서 누구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아 결국 질투와 비방을 온 몸으로 느낀 사람이 있다면 바로 요셉일 것이다. 야곱은 노년에 가장 사랑하던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 요셉을 여러 아들보다 깊이 사랑했다. 그 사랑의 표현으로 그는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지어 입혔다(창 37:3). 형들의 질투는 아버지의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꿈은 형제들과 부모마저 요셉 앞에 절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그에 대한 형들의 질투는 너무나 컸다. 결국 이 질투와 비방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한국어 성경에서 채색옷이라 번역된 히브리어 ‘케토넷 파씸 kettonet passim’은 색깔을 의미하기 보다는 소매와 단이 긴 원피스처럼 생긴 옷으로 기본적으로 남자들이 갖추어 입는 옷으로 보고 있다. 요셉은 그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양을 먹이러 나가지 않았고 집에 머물러 있었다. 야곱의 사랑은 요셉에게 노동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대의 노동은 가축을 치거나 농사를 지어야 했기 때문에 남자들은 보다 활동이 편한 소매와 단이 짧은 원피스 같은 케토넷(kettonet) 옷을 입거나 웃통 없이 스코틀랜드의 킬트처럼 짧은 치마만을 걸치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이집트의 베니하산 벽화에서 발견된 물건을 팔러 온 가나안인들의 행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상류층의 사람들은 이집트의 흰색 린넨(성서에서는 이집트의 베옷이라고 번역)으로 만든 소매와 단이 긴 옷을 입었다. 이집트의 벽화에는 투트모세 같은 왕들에게 조공을 바치러 온 가나안의 신하들이 이와 같은 의복을 갖춘 것을 볼 수 있다. 요셉이 입은 케토넷 파씸은 아마도 이 신하들의 옷처럼 값비싼 옷이었을 것이다.
요셉이 도단에서 그를 미워하는 형들을 만났을 때도 그는 역시 케토넷 파씸을 입고 있었다. 형들은 그의 옷을 벗긴 후 그를 상인들에게 팔아버렸다. 형들은 결국 숫염소를 죽여 그 피를 요셉의 옷에 적신 후 야곱에게 가져갔다. 주변의 농사꾼이나 목동들은 이러한 긴 소매의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야곱은 그것이 요셉의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훗날 요셉으로 그의 형제들과 부모를 기근에서 구해 내는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그는 아버지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죽은 아이로 생각되었다.
서로 물고 뜯고 할퀴는 대통령 후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저들이 입고자 하는 대통령이라는 옷은 분명 국민의 사랑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 대한 비방으로 이 옷의 가치를 저하시키고 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각자 값비싼 상류층의 ‘케토넷 파씸’을 입고 있다. 그러나 교단 내에서 혹은 교회 내에서 서로에 대한 질투와 비방으로 서로 상대방의 옷을 벗기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옷이 벗겨졌을 때 우리는 오랜 동안 사랑받지 못하는 버려진 아이와 같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