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영성 학문’의 홍수시대이다. 많은 영성에 대한 세미나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런 현상은 현대사회나 기독교 공동체가 생명수 같은 영성에 목말라 있으며 또한 역설적으로 세상과 교회에 ‘영성’이 메말라 탁류가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때 우리의 전통적인 성결의 영성을 다시 한 번 숙고하여 성결 영성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싶다.

첫째, 성결 영성의 아름다움은 성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자신 안에서 회복함에 있었다.

영성이란 죄인이 영적 존재로 회복되어 하나님과 거룩한 영적 관계 또는 예배를 갖는 성품으로 변화됨을 말한다. 존 웨슬리에 의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참다운 영이시다. 그분이 영이시다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그분은 육체를 가지지 않으셨다는 것이지만 적극적으로는 그분은 신령한 성품 즉 성결 사랑 정의 지혜 등을 가지셨다는 것이다(존웨슬리의 요 4:24 주해 참고).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타락하여 이 신령한 성품을 상실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이를 회복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형상’ 회복 또는 ‘하나님의 성품’ 회복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다.

신령한 성품에 제일 반대되는 부정적 성향은 죄이다. 성결교회는 이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떠나 성결함을 요구하신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이런 의미에서 웨슬리는 구원의 과정에서 의인(justification)보다는 성결에 강조를 두었다. 성결의 상태는 성도가 내면의 변화 또는 실적인 거룩한 상태의 회복을 말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결교회가 사중복음의 덕목에서 “의인”이라는 말보다 “중생”이라는 말을 택함도 성결교회가 성결을 강조함을 잘 알려준다. 즉 사중복음은 의인, 성결, 신유, 재림이 아니라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인 것이다. 사실 의인과 중생은 동시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의인됨은 외면적이고 법적인 상태의 회복을 말하지만, 중생됨은 내면적이고 실제적인 거듭난 상태 즉 ‘초기 성결의 시작’을 강조한다. 

비록 종교개혁의 공헌이 인간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워진다는 것을 강조한 의인(이신칭의) 교리를 재발견한 점이지만, 불행히도 때론 이 교리가 잘못 오해되어 하나님께서 인간의 거룩한 생활을 간과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웨슬리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모라비안들과  결별한 근본적인 이유도 그들이 성도가 의인이 되면 자연히 성결해진다고 잘 못 생각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의인된 자는 다시 성결의 은혜로 성결해야 됨을 강조했다.

우리는 이신칭의 교리가 ‘값싼 은총’으로 오해되어 성도의 성결을 약화시킨 점을 지금도 볼 수 있다. 그 일례가 성결이 필요 없다고 보는 도덕무용론과 율법무용론이고 또는 알게 모르게 그런 성향을 따르는 교회의 세속적 흐름이다. 성결보다는 세속의 방법을 닮아 이젠 기독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근본적인 힘을 상실해버렸고 드디어는 세상으로부터 지탄받는 지경까지 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게 불리는 단계까지 왔다.

성결인들의 선배목사들은 성결을 강조해왔다. 그런데 이 성결은 오직 하나님의 성결의 은혜로만 가능하기에 그들은 성결의 은혜 체험을 강조해왔다. 신학교수가 수업 중에 스스로 죄를 자백하고 이를 듣던 신학생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이를 해결하려고 성결의 은혜를 갈망하여 성결을 체험했다. 성결의 신학 캠퍼스와 전국의 총대들이 모인 총회장에서 이런 진지한 성결을 갈망하는 아름다운 성결의 영성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둘째, 성결 영성의 아름다움은 성결의 적극적인 면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하는 생활”을 강조함에 있었다.

영성생활은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영적 삶이다. 성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닮아가고,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 그가 걸으셨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을 항상 마음속에 모시고 그에게 영으로 대답하는 영적 호흡을 계속하는 성결하고 행복한 삶을 말한다. 

이러한 영성생활은 자연히 이웃과 연관되어진다. 진정한 영성생활이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으로 모든 이웃 피조물들에게 자비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생활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한 성도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이웃과 같이 사는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삶이다.

성결의 영성은 속세를 떠나 홀로 신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아픔을 나누며 그들의 영혼의 건강을 위해 열심히 전도하는 것이다. 세속을 떠난 수도원적인 영성이 아니라 도시 속에 있는 수도원적 영성이다. 아침저녁으로 기도와 성경읽기 찬양을 한 웨슬리는 낮에는 환자와 죄수 그리고 가난한 자를 방문하여 그들을 도왔다. 문준경 전도사는 섬에 사는 자들의 영혼을 위해 전도하고 가난한 자를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면서 그들의 영혼을 사랑했다. 
이처럼 성결 영성의 아름다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동시에 같이 강조함에 있었다.

셋째, 성결 영성의 아름다움은 성도의 ‘통합’과 ‘완전’을 향해 감에 있었다.
영성은 주로 영적인 면만을 다루는 것처럼 오해되어 성도의 육체나 몸에 대한 것 또는 물질 등을 도외시하는 경우가 상당하지만, 성결교회는 영의 구원과 함께 육체의 구원을 같이 중요한 일로 여겨 신유의 복음을 강조하여 완전한 구원을 지향했다. 이런 영성에서 우리는 하나님도 만나며 동시에 성도도 서로 만난다.

성결의 영성에서는 이런 다양성들이 통합되고 정리된다. 성결의 영성은 어떤 영성처럼 개인적인 영성 중심만을 강조하지 않고, 사회 참여만을 중시하는 공동체만을 중요시하는 공동체적 영성도 아니고,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만을 중요시하는 것의 영성도 아니다. 오히려 성결의 영성은 이런 모든 점을 통합하여 유기적으로 이해한다.

본 교단 헌법 서론에 “성결교회 신앙교리의 근간은 요한 웨슬리의 복음적 성결의 주창을 배경으로 하여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복음으로 요약된 교리“라고 되어 있다. 웨슬리의 성결은 기독교인의 완전을 말한다. 이런 완전단계에서도 단순히 자신의 힘만이 아니라 성결의 하나님의 힘에 의지한다.

성화의 과정에서 루터는 성도는 “반복: 죽고 새롭게 태어나기를 계속하는 것”으로 보고, 칼뱅은 “여행: 점점 의로워지는 과정”으로 봤다. 반면에 성결의 영성은 성화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점점 거룩해지는 과정과 동시에 하나님의 성화의 은혜로 순식간에 거룩해지는 순간적인 성결을 강조한다.

이런 완전의 영성은 개인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키는 힘이다. 지금 교회의 어려움의 원인가운데 하나는 성도들이 현실에 안주하여 완전의 영성을 추구하려고 시도도차 하지 않는 낮은 차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성결의 영성이 이런 시대에 필요함이 더욱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에게 이번 가을 성결의 영성이 풍성하게 넘쳐지길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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