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씨 집안 용(容 얼굴. 몸가짐)자 항렬로 음력 7월 초이렛날에 태어나 견우와 직녀의 만남을 위한 오작교처럼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평생을 살았던 고 김용칠 목사(1927.7.7~2002.4.1). 음력으로 날짜를 헤아릴 일이 별로 없는 요즘이지만 문득 음력을 찾아보게 하는 칠석날.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진 견우와 직녀처럼, 만날 길 아득한 이 시대에 다리를 놓을 까막까치는 어디 있을까.
▨… 우해 김용칠 목사는 서울신학교 1학년 때에 결혼하고 이듬해 전주천이 흐르고 있는 황량한 태평동 천막 교회에 첫 목회자로 부임한 이후 42년 동안(1956~1997) 오직 한 교회를 목회하면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모든 공은 성도들에게, 모든 책임은 목사인 자신이 진다는 마음과 몸가짐으로 하나님의 집을 지켰다. 그래서 그의 삶에는 늘 따스함이 있었고 평안함이 넘쳤다.
▨… 6.25 전쟁 중에 예수를 믿는 참 신앙과 교회를 지키다가 어머니를 비롯한 일가족 23명이 인민군과 공산 폭도들에 의해 죽어간 순교자의 후손이기에, 주님이 피로 쓰신 성경을 심장이 뛰는 가슴에 꼬옥 끼고 사람 낚는 어부로 살았다. 사명의 길이 너무나 힘들 때면 순교자의 피가 호소하는 땅 두암교회를 찾아가 어머니의 자취를 더듬으며 무릎을 꿇어 기도했다고 한다. 그 눈물이 성결교회와 복음 전도의 자양분이었으리라.
▨… 김용칠 목사의 아호는 우해(愚海)였다. 시인 허소라는 그의 시 <어떤 바다>에서 “우해는 결코 어리석은 바다가 아닙니다/오히려 겸손의 바다입니다/어머니의 앞가슴 같은/포용의 바다요, 관용의 바다요, 화해의 바다입니다/인고의 바다, 사랑의 바다, 희망의 바다/끝내는 승리의 바다입니다.”라고 노래하였다. 안톤 체호프가 사랑은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하였다는데, 나는 어떤 바다일까.
▨… 그분을 아버지처럼 존경하며 따랐던 교단의 한 사람은 말했다. 생일이 다가오면 으레 기도원으로 몸을 피하여(?) 신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했던 분. 언제나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여 말보다 행동과 실천으로 우리를 감동케 하던 분. 이런 분과 같은 시대에 살았고 이런 분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활천 2005.12). 칠석 전야 해후의 기쁨으로, 당일의 헤어지는 아쉬움으로 흘리는 눈물비가 그리워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