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 그리워, 깊은 바다 그리워 남한강은 남에서 흐르고 북한강은 북에서 흐르다가 흐르다가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남한강은 남을 버리고 북한강은 북을 버리고 아아,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한강되어 흐르는데 아름다운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설레는 두물머리 깊은 들에서 바다 그리워 푸른 바다 그리워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 이현주 목사의 시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이다. 이 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되는 우리 민족의 소원을 노래하지만 장사익이라는 소리꾼을 만나면서 민족의 통곡으로 변한다. 온전한 독립을 이뤄내지 못한 우리의 어리석음이 치유될 수 없는 아픔과 상처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힘으로는 해방을 쟁취할 만한 준비가 이뤄지지 않았기에 강대국들의 제멋대로의 결정을 눈물을 삼키며 수용할 수밖에 없었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는가?
▨… 그렇다. 해방 80년을 말하지만 민족의 하나됨이 깨진 80년은 한국전쟁이라는 피투성이의 상흔만 남겼고 남과 북은 두물머리를 지났음에도 그 상처를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아니, 핵폭탄을 양손에 움켜쥔 북은 남이 이룬 경제적 발전 따위는 허상이라고 비웃고 있다. 일제에서의 해방은 온전한 독립으로의 열매는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해방은 단일 민족의 위치에서는 진정한 독립일 수가 없는 것임을 뉘라서 부인할 수 있는가? 온전한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 무엇을 버릴 각오를 다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새롭게 자문하기를 명령한다. 흙(adamah)에서 한 글자를 버림으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바르게 알고 있다면 두물머리에서는 우리의 버림이 먼저여야 함을 아직도 말씀의 의미를 외면한 채 망설이기만 하지 않느냐고.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이미 깨우치고 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마가복음 8:34)”는 말씀은 우리가 자기를 부인할(비울) 때 우리 주님은 그 비운 자리를 채워 주신다. 다시 묻자. 해방이 온전한 독립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