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에게 ‘에피스테메’는 무엇인가?
에피스테메(episteme)는 ‘참 지식’을 말한다. 이는 그 시대마다 조금씩 그 의미를 다르게 해석한다. 이데아는 플라톤에게 지식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실천적 목적의 원리에 대한 순수한 지식이 에피스테메였다.
현대 철학자에게 에피스테메는 한 시대의 인식과 이론이 가능하게 되는 출발점이고, 앎이 형성되는 공간적 질서이며, 그 안에서 학문이 형성되고 경험이 성찰되는 역사적 선험성이다.
이 심층적 윤곽은 한 시대의 모든 의견의 생산을 가능하게 한 인식의 기준이며, 같은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험적 질서를 제공해 주는 문화적 코드이다. 그래서 한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과 생각할 수 없는 것의 사유의 한계를 정의하는 토대가 에피스테메이다.
모든 학문은 에피스테메의 테두리 안에서 상호 긴밀한 관계를 맺고 발전하였기에 근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근대의 에피스테메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14-16세기에 일어난 르네상스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유사성이 었는데 고전주의 시대(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체의 약 150년간)에 들어와 말과 사물의 유사성이 붕괴되어서 사물 속에 감추어진 신의 이름이나 사물과 사물 사이의 유비는 없어지고, 언어는 사물을 모방 또는 재현하는 도구적 언어가 되었다.
따라서 ‘앎’은 추정이 아니라, 개별적인 동일성과 차이에 기초한 분류와 분석의 방식이 되는 말은 구체화되면서 생각을 재현하였으며, 그림은 사물을 재현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 안에 모든 존재들이 있고, 인간은 그 존재들을 언어적 기호 또는 그림으로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의 토대에 학문이라는 재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고전주의 시대의 재현에 대한 에피스테메는 분류학이었다. 분류학은 복잡한 표상들을 하나의 기호 체계 안에 일목요연하게 인식대상의 순서를 정리하는 일람표 작성이 학문이었고, 그 일람표가 앎의 중심이 되었다.
비록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언어적 기호를 사용할 능력을 타고난 합리적인 존재라고는 하지만, 인간은 동물 일람표 안에 별다른 특권을 누릴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자이며, 자신의 고유한 체험을 지닌 유한한 실존일 뿐이다.
신학자 요한 웨슬리는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인 재현의 시대를 사는 동안 그의 사유 안에는 자신을 위한 재현, 이미지나 거울 속의 영상을 통해 자신을 살펴보는 재현, 그림 안의 복잡하게 얽힌 것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동안 어쩌면 진정한 인간의 모습에 대해 고뇌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절묘하게 일람표를 작성하는 주체적 인간의 부재이고, 더 나아가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에서 인간의 부재를 말하고 있다.
그러면 요한 웨슬리에게 에피스테메(참 지식)는 무엇인가? 각 교회는 관점의 차이나 입장의 차이 때문에 웨슬리에 대한 에피스테메를 혹자는 ‘성결’이라고 말하고, 다른 이는 ‘사랑’이라고 주장하며 진자의 추처럼 지금도 흔들리고 있는 것은 정형화된 신학의 느슨함 때문에 웨슬리에게 에피스테메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웨슬리의‘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재현의 에피스테메가 부재했던 인간으로부터 나온 억견 또는 의견이 되어서는 안되며, 온전한 에피스테메… 참 지식이 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