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장애인 배려 지수는?

이명재 목사
                         이명재 목사

지난주 한 장애인 선교단체 하계 수련회에서 특강을 했다. 

장애인 관련 단체에서 강의 요청을 해오면 가능한 응하고 있다. 주제가 ‘자신감을 갖자’였다. 자신감 결여가 장애인들의 삶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자는 의도였다.

​강의가 끝나고 선교회를 이끌고 있는 목사님도 만족감을 표했다. 이 목사가 장애인이어서 그런지 통하는 게 있었다고 했다. 이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편에 응어리진 게 있었다. ‘장애인의 자신감 갖기’가 좋은 말이고 희망적인 메시지이지만 구두선에 그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특강을 하는 나도 장애로 인해 오는 자신감 상실로 고뇌하며 좌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 않나.

​얼마 전 딸아이가 결혼을 했다. 신랑 신부가 기도하며 결정했다면서 나에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해 왔다. 대중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극구 사양을 했다. ​아이들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들을 가장 잘 아는 아빠가 서주셔야 한다고 고집했다. 할 수 없이 수락하고 말았지만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개는 아빠로서 주례사를 하고 혼인 서약을 받고, 성혼 선언을 공포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으로 느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런 것을 감당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4단으로 된 강단 계단을 오르는 것이었다. 앞에서 내 육신의 장애를 고스란히 노출해야 하니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가끔 다른 교회 행사에 참석해서 순서를 맡을 때가 있다. 장애인에게 민감하게 다가오는 것은 강대상에 오르는 경로이다. 많이 완화되었다곤 하지만 아직도 예배당에서 접하는 강대상의 높이는 여전하다. 주의 종이라는 권위의식의 산물일 텐데 성서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는 말할 것 없거니와 지난 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교회 문화는 세상 문화를 이끄는 동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타성에 젖은 교회 문화는 급속하게 변화하는 세상 문화에 쫓아가기 바쁘다. 예배당을 성역이라며 후진성을 합리화하는 것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교회의 장애인 배려 문제도 그렇다. 장애인에 대한 성경 용어도 많이 순화되었고, 중대형 교회의 예배당 현관에는 장애인을 위한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다. 바람직한 변화이고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예배당 안 강단에 경사로 시설이 되어 있는 곳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우리 법에는 회중석보다 높은 위치의 공공시설 및 상업시설 강단에는 경사로를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고정된 곳은 말할 것 없고 한시적 무대에도 경사로를 확보해 놓아야 한다. 이 규정을 어길 때 법적 제재가 가해진다. 교회도 여기에 따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서구 선진국에서는 승강기가 필요한 곳에 그것이 없다든지 또 경사로 시설이 되어 있어야 할 건물에 그것이 갖추어지지 않은 건물은 ‘잔인한 건물(a cruel building)’로 낙인 찍힌다고 한다. 이런 건물에서 영업행위를 하는 점포는 사람들이 외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나라 장애인 인구를 전체 인구의 10% 정도로 보고 있다. 등록 장애인만 그렇다. 등록하지 않은 장애인까지 헤아린다면 그 숫자는 많이 늘어날 것이다. 적지 않은 장애인들이 같이 호흡하며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교계에도 장애인 성도에 대해 보다 많은 배려가 요구된다. 신체적 약자에 속하는 노인층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

2025년 말부터 장애인․노인․임산부 편의 증진에 대한 법이 대폭 강화되어 시행된다. 교회가 여기에 호응할 때가 되었다. 

신앙 공동체는 일반 조직과 달라야 한다. 사랑이 녹아 있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도우며 함께 손 잡고 나아가는 것이 사랑이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예수님이 지향한  삶이 이런 것 아니었나! 교회의 장애인 배려 지수, 보다 높일 순 없을까.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