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명저 “역사의 한 연구”에서 역사발전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도전과 응전의 도식을 설명했습니다. 한 민족이 직면한 민족적 도전을 슬기롭게 응전하면 새로운 역사의 장이 개막되지만 창조적 응전을 하지 못할 때는 역사는 퇴보한다는 요지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토인비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한 민족에게 닥쳐온 도전을 창조적 응전으로 대처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일반대중이 아니라 창조적 소수, 곧 지도자들이라는 점입니다. 역사는 소수의 비전을 가진 미래를 전망하는 깨끗한 지도자들에 의해서 이끌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지금 우리교단은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지도자와 성도들이 뜻을 같이하여 공동의 목표를 한마음으로 추구할 때 우리가 바라고 대망하는 교단이 이루어 질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가 원하고 요구하는 지도자상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첫째,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교회 지도자는 깨끗해야 됩니다. 그 이유는 교회 지도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삶의 문제는 어느 시대나 중요하고 그것이 복음의 역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하물며 교회 지도자의 삶에 있어서야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앙과 무관한 삶, 삶의 현장에서 구체화되지 못하는 설교, 그것은 항상 복음의 의미, 복음의 역사를 무력화시키는 주범이었습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의 삶은 어느 시대나 주목받는 관찰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만큼 삶 속에 구체화되는 복음적 삶은 증거의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그들은 사방으로부터 노출된 세계 속에서도 신자들의 구별된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 했기에 박해 속에서도 교회가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스테판 닐의 설명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큽니다. 교회 지도자의 삶은 자기 자신의 삶의 양식, 그 이상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습니다. 성결의 가족들, 아니 교회 지도자들이 먼저 자기를 살펴 겸허한 반성과 경고를 삼는다면 내일의 우리 교단을 더욱 새롭게 할 것입니다.

둘째,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교회 지도자는 신자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본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 그런 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지, 말로만의 외침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수사와 미사여구로 아무리 수식한다 하여도 삶으로 본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 웅변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굉장한 웅변과 큰 소리만 들어왔습니다. 이제 앞으로의 시대를 지도할 사람은 지도자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큰 소리 치는 웅변가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것이나마 실천하고 앞장서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몇몇 사람만이라도 이 좁은 길을 먼저 따라 나서느냐에 오늘의 교회는 혁신될 것이고 우리 교단의 앞날에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셋째,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교회 지도자는 판단이 공정하고 모든 일에 신실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젊은 지도자 디모데에게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그것을 엄히 명령했습니다. 지도자의 공정성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공정한 판단은 판단 능력에도 달려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고 사리사욕을 초월할 수 있어야 가능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시므로 절대적으로 의로우시고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시며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고 편견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비합리적인 권위주의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직무는 그것의 이행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권리, 힘, 혹은 권위가 필요합니다. 모든 힘, 권리, 특권은 그것을 남용하려는 유혹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의 경우에는 권위와 특권의 남용이 권위주의의 형태로 나타나기가 쉽습니다. 권위주의란 권위가 주어진 목적을 망각하고, 단순히 권위 그 자체를 즐기는 잘못으로, 그것은 결과적으로 진정한 지도력을 약화시키고 올바른 권위까지 냉소의 대상으로 만드는 매우 무서운 병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에서의 영적 지도는 권위와 권리를 요구하거나 행사하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피지도자에 의해 인정되는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작금의 우리 교단은 한국 교회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하고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 계제에 총회 지도자들은 믿음의 용기로 잘 마무리 하셔서 어지러운 역사의 마침표를 찍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 교단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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