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4:13~17)

성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알게 하는데 그 분명한 목적이 있을 것 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묵상 혹은 큐티’라는 이름으로 성경을 얼마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때로는 도덕적인 시각에 가려, 때로는 우리가 배운 인문학적 지식에 가려, 혹은 교회나 자기 목적을 이루려는 수단으로 성경을 왜곡하고 잘못 해석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마, 에스더의 이야기도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에스더와 성경이 말하고자하는 에스더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의 어느 본문을 바라보든지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스더는 페르시아식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본명은 ‘하닷사(2:7)’였습니다. 하닷사는 도금양과의 식물 ‘화석류 나무’를 뜻한다고 합니다. 화석류 나무는 느헤미야의 기록을 보면 초막절에 초막을 지을 수 있는 나무의 한 종류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할 때 광야에 화석류 나무를 심는다고 했고, 화석류는 질려(쐐기풀)를 대신하여 나는 식물이라고 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환상 중에도 화석류 나무 사이에 붉은 말을 타고 있는 여호와의 사자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화석류 나무’는 성경에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된 본문에 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에스더의 부모는 그녀의 이름을 지을 때 이스라엘의 회복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그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이 부모의 믿음처럼 살지 못했습니다.

고레스왕 원년의 1차 귀환자는 사만이천 삼백육십명(에스라 2:64)에 불과했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고레스의 1차 귀환 때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캄비세스와 다리오와 아하수에로 왕으로 이어지기까지 몇 차례의 귀환이 있었지만 그녀의 가족과 그녀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현실에 머무르는 삶을 살고 있었겠지요. 모르드개의 이름도 사실은 이방의 신인 ‘마루둑’에서 온 이름입니다. 자기의 출신과 국적을 속이고, 자기 자신의 성공과 영달을 위해 개명을 하고,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결코 여호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믿음의 행위로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에스더는 왜 우리에게 위인이 되었을까요? 아마도 오늘의 본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민족 전체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을 때 왕비의 자리에 있었던 여인이 금식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하고 나아가는 그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에스더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자고 마음에서 쾌재를 외쳤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본문은 에스더의 위대성을 드러내는 본문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성취’에 그 초점이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하만(사단)의 민족 멸절의 계획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역전의 드라마를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림’의 아침을 맞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에스더나 모르드개처럼 믿음 없고 개인의 영달이나 꾀하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느날 자신이 얻은 그것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죽음을 각오한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더 얻으려 발버둥 치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조차 내려놓고 더 잃을 것도 없는 겁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십니다. 우리는 아직도 자신의 유익과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더 잃을 것도 없는 겁 없는 여자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될 것인지 그 뜻을 정해야 할 때입니다. 세속적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를 보여주시는 본문이 아닐까요?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영원토록 우리 주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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