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이 역사를 만드는가?
한국성결신문 제1451호(5월 24일자)에 실린 조화운 목사의 글을 읽었다.
글의 내용 중 “장로교가 버티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신사참배 했다”는 기고자가 인용한 필자(허명섭)의 표현은 장로교를 치켜세우려는 것도, 성결교회의 자긍심을 훼손하는 자학도 아니다.
당시 총독부 관리도 장로교의 신사참배 결의를 두고, “이제야 기독교의 최후의 아성은 무너진 것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사변하에서의 기독교). 거두절미하고 지면 관계상 ‘신념이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밝히며, 기고문의 내용에 대해 답변하고자 한다.
첫째, 기고문의 1)번에 대한 답변이다.
공포된 적이 없다고 하는 수정된 헌법은 소화 16년, 즉 1941년 9월 10일에 발행된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규칙]이다. 이 [규칙]의 목차 앞에는 ‘황국신민의 서사’가 실려 있으며, 기존의 교단 헌법에는 없던 “제2절 황실과 정부에 대한 의무” 조항을 신설하고, 제27조에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대일본제국을 통치하시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을 봉대하고 국헌을 중히 하며 국법에 순종할지니라.”
이것보다 ‘성결교회가 신사참배를 용인했다’라는 명백한 증거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필자의 주장은 단순히 추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활천] 1940년 12월호 “통신”에 보면 ‘성결교회 임시연회 개황’과 ‘제1회 성결교회 총회 개황’이 명백하게 수록되고 있다.
또한, 헌법 표지에 [헌법]이 아니라 [규칙]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은 총독부의 시책에 따른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헌법]이라는 표현은 ‘일본 제국헌법’ 만을 일컫는 말로 쓰게 하였고, 교회 등에서는 [규칙]이나 [교칙] 등으로 바꿔 쓰도록 강요했다. [헌법]에 비해 권위가 약하거나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기고문의 2)번에 대한 답변이다.
해방 이전 성결교회의 총회 제1기는 1933년 4월부터 1936년 9월까지이고, 제2기는 1940년 10월 22일부터 시작된 총회이다. 두 기간 사이, 곧 신사참배 문제로 시국이 어수선할 당시 성결교회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은 이사회였다. ‘감독제’라는 말도 이명직 목사가 사용했던 것이다.
기고자가 제기한 문제는 감리교의 감독제도와 혼돈한 것에서 비롯된 것 같다. 성결교회의 경우 연회는 최고 의결기구도 아니었고, 입법권도 없었다. 더구나 총회 소집요구권은 가당치도 않았고, 오히려 이사회의 요구가 있을 때만 연회가 소집될 수 있었다. 입법권도 이사회에 있었고, 헌법이 정한 권한 아래서 이사장이 성결교회를 이끌어 나간다는 의미에서 ‘감독제’라는 것이다. 기고자가 제기한 그밖의 문제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것이다.
셋째, 기고문의 3)번에 대한 답변이다.
[일제말성결교회 수난사자료: 광주지방법원소송기록] 조서에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는 표현뿐 아니라, 성결교회가 가입한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신사참배를 수용하기 때문에 그 시책에 따라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광주에서 열린 시국간담회에서 이명직 목사가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설득했던 논리이다.
이것을 필자는 연구논문에서 밝혔다. 그리고 심문을 받은 북교동의 목포교회는 1936년에 성결교단을 탈퇴하지 않았다. 성결교단을 탈퇴한 곽재근 목사가 세운 하나님의 교회(현재 합동한신)에 소속된 교회는 측후동에 있는 목포교회이다.
넷째, 기고문의 4)번에 대한 답변이다.
성결교회의 각종 모임에서 가졌던 식순에 기록된 궁성요배와 같은 표현은 신사참배를 수용했다는 것을 뜻하며, 단지 일본이 하달한 내용이 아니다. 당시 기독교를 비롯해 각 기관들의 공식적 회합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자료의 문제와 관련하여, 역사의 개연성이라는 용어가 있다. 사전적 의미는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질’이다. 역사 기록이 가진 ‘진실과 허구’ 사이의 긴장을 염두에 둔 것으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개연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연성을 뒤엎을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나오지 않는 한 그 범주를 넘어서는 것은 위험하다. 역사는 상식의 체계이기 때문에 개연성의 틀 내에서 서술된다면 상당 부분은 객관적일 수 있다.”
기고자에게 묻고 싶다. 성결교회에는 ‘신사참배 반대’를 결의한 자료나 그런 의사를 표명한 자료가 있는가? 후에 신사참배 문제로 진통을 겪기는 했지만, 동아기독대(침례교 전신)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언명한 문서를 갖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