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역사를 보면 다양한 유형의 목회자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선한 목자의 길을 걸었던 이도 있고, 삯군 목자의 길을 걸었던 이도 있다. 삯군 목자 중에 자신이 삯군이라 생각한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정작 본인은 당연한 사도의 권리마저 내려놓았지만 충실한 복음의 사역자들을 합당하게 예우하라는 사도 바울의 언명이다.
사도 바울의 이런 태도조차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선한 목자의 마음을 가진 이는 아닐 것이다. 자신의 것을 내려놓으면서까지 신자들에게 좋은 것을 하나라도 더 주고자 하는 목자가 있고, 자신의 위신과 체면을 앞세우며 신자들에게 돌아야할 몫마저 방해하는 목자도 있다.
박동희 장로가 2천회 이상의 신유 집회를 인도하면서 상당수의 목사로부터 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적당히 하고 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로의 은사가 다르다”라고 생각했던 목사들은 박동희 장로의 집회를 환영하고 적극 후원했다.
박 장로 부부의 집회는 주로 가난한 자, 상처 입은 자, 노숙자 등 주로 사회적 약자들을 향하였다. 그래서 자비량 사역이 많았고, 그 때문에 많은 빚을 지기도 했다. 해외 집회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해에는 해외 집회를 35회나 했는데, 무려 19회가 무보수 집회였다.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손익을 계산하지 않고 우직하게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순종했다.
1982년 광주의 중앙기도원 사역도 그런 맥락에서 시작되었다. 하루는 서울로 올라오지 못하고 광주 양동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순복음교회 신자가 아프다고 찾아왔다. 겉으로는 말짱해 보였는데, 너무 아파서 고개가 안 돌아간다고 했다. 그래서 손을 얹고 기도했더니 고개가 자유스럽게 돌아갔다.
그때 그 집사가 간청했다. “서울에는 은혜 받은 사람도 많은데, 광주에는 별로 없잖아요. 광주를 위로하기 위해 우리가 집회 장소를 제공할테니, 서울로 올라가지 말고 여기서 사역해 주세요.” 당시는 5.18민주화 항쟁 이후라 광주에는 상처 받은 사람들이 많았고, 부부도 마땅이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중앙기도원은 양동에 있는 그 집사의 건물 지하(30평)에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고침 받은 각종 병자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이들 부부의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사방으로 퍼졌다.
이들 부부의 후원자 역할을 하던 방철호 목사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것도 이곳이었다. 하루는 방 목사의 사모로부터 전화가 왔다. “집사님, 목사님이 많이 편찮으세요.” “빨리 병원에 모시고 가세요.” “목사님이 집사님에게 기도를 받고 싶으시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장로와 집사 네 사람이 방 목사를 모시고 왔다. 박 집사는 목사에게 안수할 수 없어, 도중에 그냥 낫게 해달라고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권에 못이겨 배 위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그러자 방 목사가 눈을 껌뻑거리며 깨어났다. 방 목사가 일생에 겪은 세 가지 기적 중 하나였다. 이후 방 목사는 8.15연합성회를 비롯하여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자신의 치유 간증과 함께 박 장로 부부의 사역을 소개했다. 이때를 전후하여 박 장로 부부의 사역은 부흥의 파도를 타기 시작했으며, 물꼬가 터진 것처럼 집회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박 장로의 집회가 열리는 곳마다 수많은 병자가 치유되었고, 교회 성장과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다.
한 번은 박 장로가 통합측 오산교회에 집회하러 갔다. 날씨가 몹시 사나웠고, 눈도 많이 왔다. 어떤 앉은뱅이가 서울에서 병을 잘 고치는 용한 의원이 온다고 소문을 듣고 참석했다. 첫 시간에 박 장로가 그 병자에게 “고개 들고 일어나 걸으세요”라고 말하면서 머리에 한 번 손을 얹고 지나갔다. 그런데 뒤에서 박수치고 난리가 난 것이다.
돌아서 보니 그 앉은뱅이가 뛰면서 춤추고 있는 것이었다. 이후 엄청난 기적의 연속이었다. 주일에 보통 17-18명 모였는데, 집회에는 300명 이상 모여들었다. 너무 추운 겨울이었지만, 우체국장이 난로를 가져오고, 음료수가 박스로 들어오고, 마을잔치가 될 정도로 정말 대단한 집회였다. 집회 후 오산교회는 신자가 100여 명으로 부흥하게 되었다. 오산교회의 역사는 이제 막 피어오르는 작은 불꽃에 불과했다. 이후 그 불꽃은 40년 이상 국내와 해외를 넘나들며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드러내는 영광의 불이 될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