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봄 우리나라에서는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가톨릭 주교 한 분이 선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같은(?) 하나님을 믿어도 신앙의 길은 다르게 간다. 이 다른 길은 누구의 책임일까?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프로테스탄트의 고집 탓일까? 2천년의 권위를 지키려는 가톨릭의 가르침 탓일까.

▨… 신앙이 무엇인지 많이 고민해본 여기자(김지수의 인터스텔라)가 초보 신앙인에게나 물을 법한 질문을 던졌다. “무슨 기도를 하시나요?” “무엇이 필요한 지 제 마음을 다 아시기에 가만히 침묵을 지킵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 가만히 있어요. 나는 성당 다니라고 안 해요. 그냥 사정을 이야기하면 들어줘요. 기도해달라고 하면 기도해 주고 좋은 일 얘기하면 힘껏 손뼉 쳐줍니다.”

▨… 이 주교의 주례로 이장인 농촌 총각과 베트남 아가씨가 결혼 했다. 두 사람 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 주교는 커다란 백지에 베트남 어로 ‘사랑, 인내, 친절’이라고 크게 써서 하객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너를 위해 내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인내도 내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이걸 크게 읽었더니 다들 까르르 웃었어요.” 이 결혼을 우리 주님이 축복하지 않으실 수도 있을까.

▨… 1929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969년 안동교구장을 지낸 벽안의 원로사제 두봉 주교는 한국을 우리나라로 부르는데에 익숙한 프랑스 사람이다. 그는 ‘가난한 교회’를 내걸고 한센병 환자를 위한 병원을 설립했고, 가톨릭농민회 창립을 지원했다. 그는 권력으로부터 농민을 지키기 위해 ‘오원춘 사건(1978)’의 중심에 뛰어들기도 했다. 교단의 신앙을 고집하지 않는 이런 목회를 우리 성결인 목회자들이 보여 준다면 교단은 용납할까.

▨… 윤공희(101) 빅토리노 대주교는 현재 전 세계 가톨릭 주교 중 최고령자다. 5·18광주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서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애쓴 ‘5·18의 산 증인’이다. 5·18은 윤 대주교에게 신앙적으로는 부활체험이었다고 나권일(월간중앙 선임기자)은 증언했다. 계엄군의 몽둥이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젊은이를 도우려 하지 않은 자신이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 간 사제와 무엇이 다를 수 있겠느냐고 묻고 고백한 사람은 윤공희 자신이었다. 두봉이나 윤공희의 신앙은 비성결인적인지 누구에게 물어야 정답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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