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일상언어로 바꿔라
잘 들리는 설교의 특징은 단순 명료하고, 간결한 설교이다.
이를 위해 실천할 일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첫번째는 어렵지 않고 쉽게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설교학자로서 설교 초년병부터 원숙한 설교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설교를 들으면서 좋은 설교의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좋은 설교는 쉽게 들린다는 것이다. 설교 경험이 적을수록 설교를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다.
설교 초년병일수록 복잡하고 어려운 신학적 철학적 개념들을 자주 사용하고 경험이 풍부한 명설교자들일수록 청중이 굳이 주의집중하려 애쓰지 않아도 귀에 쏙쏙 들리는 쉬운 설교를 한다. 신학생들의 설교를 들으면 –성, -화, -적, -주의 등 개념적 추상적 언어가 많은 반면, 많은 청중들이 공명하는 대중설교가일수록 구체적인 일상언어를 잘 사용한다.
예를 들어, “인간의 근본적인 악은 자기중심성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이기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웃을 타자화하며 대상화합니다”라고 설교한다면 청중들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까? 지난 시간에 말한 바와 같이 설교는 글이 아니라 말이기 때문에 이런 개념적 추상적 언어의 기표(記表)는 들리더라도 기의(記意)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즉 이런 언어로 된 설교를 들을 때에 글씨는 머리 속에 떠오르겠지만, 그것이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채 다음 문장을 듣게 되고, 이전에 들은 추상적 개념적 언어들은 머리 속에 지워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설교를 들을 때에는 뭔가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듣고 나서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현상이 발생한다.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는 다중적 의미를 한 단어에 표기하여 압축적으로 어떤 개념을 설명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에 종교언어로 종종 사용되곤 한다. 칭의, 중생, 성화, 성결, 구속, 속죄, 속량, 사죄, 은사, 회심, 회개 등 설교에서 많이 사용되는 언어들은 대개 이런 언어들이다.
문제는 이런 단어들이 일상에서 쓰이는 말도 아니거니와 서구에서 발전한 신학적 개념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기에 한자로 그 의미를 뜯어보아야 이해할 수 있는데, 한글전용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젊은 세대의 경우 그 의미를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의미를 찾아보거나 궁리할 시간도 없이 듣고 지나가 버리면 외계어가 되고 만다. 그래서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되지 않은 초신자들이나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 국한문 문해력이 부족한 젊은 세대들의 경우 이런 언어로 구성된 설교를 듣는 시간은 잠자는 시간 내지는 고문받는 시간이 되고 만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의 비디오를 틀어 놓고 있으면 아무리 집중하려고 해도 몇 분내 잠이 쏟아지는 것처럼 이런 언어로 쓰여진 설교를 들으면 몇 분내로 청중들이 골아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쉬운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를 지양하고 이를 일상에서 사용하는 구체적이고 쉬운 언어로 바꾸어야 한다. 각 단어들을 일일이 그에 상응하는 쉬운 단어로 바꾸라는 말이 아니라, 그 의미가 통하도록 풀어서 말하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인간의 근본적인 악은 자기중심성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이기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웃을 타자화하며 대상화합니다”라는 말을 어떻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일단 문어체 표현을 구어체 표현으로, 추상적 개념적 학문적 표현을 일상적 구체적 표현으로 바꾸어 보자. 적절한 단어를 찾기 힘들다면 예를 들어 말하는 것도 무방하다.
위 문장을 다음과 같이 바꿔보면 어떨까? “사람이 악하다고 하는데, 그 뿌리가 무엇일까요? 도대체 뭐가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아마도 뭐든지 자기가 중심이 되려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웃을 나와 함께 삶을 나누는 분들이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 남이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이겨먹으려고 합니다.” 같은 의미이지만 조금 더 쉽게 들리지 않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