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이 있으니까 더 귀하다
국보급 문화재도 결함이 보이듯
신앙-신학 흠집도 보듬는 미덕을
옛것이 좋다. 언제부터인가 고서점을 방문하는 즐거움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약속 장소를 잡을 때, 가급적 고서점이 있는 인근으로 정하고 여유 있게 미리 가서 서점을 둘러 보고 만남을 갖는다. 아쉽게도 익숙한 고서점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어서 슬프다.
알라딘 서점 한 곳이 들어서면 인근 헌책방 2-3개가 문을 닫는다는 말이 있다. 새로 들어선 서점에선 바코드가 없거나 새 책이라도 작은 흠결만 있어도 구매하지 않는다. 작은 낙서가 있거나 표지나 속지에 약간의 손상이 있어도 매입을 꺼린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이들이 무료 나눔을 시도하고, 그것도 번거로워 헌책 꾸러미를 줄로 묶어서 분리수거장에 버린다. 그렇게 소중한 고서적들이 폐기되어 사라진다. 기독교계에서라도 사라져 가는 희귀한 고서적들을 여유 있는 부지나 수양관 인근에라도 보존 관리하고 공유하는 것도 필요하리라 본다.
어느 날 폐기되는 헌책 꾸러미 속에서 공예품에 대한 진위 감별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다.
“올바른 공예품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정의도 있고 견해를 달리하는 다양한 의논도 있다. …공예품에 대한 진위 감별의 가장 간단한 기준 하나는 사용한 후 그 물품이 좋아지는지 나빠지는지로 판별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가짜로 옻칠을 한 밥상이나 법랑을 입힌 주전자와 조선의 소반이나 남부지방의 쇠주전자를 비교해보면 확실하다. 후자는 사용하는 횟수에 비례하여 품위가 더해져 사용자가 더욱더 애용하게 되는 데 비하여, 전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황폐해지는 애처로운 운명을 맞게 된다.” 아사카와 다쿠미,『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학고재신서 8, 1996 중에서)
위의 글은 일제강점기의 한 일본인에 의해서 집필된 것이라는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문화재나 문화유산과 관련된 자료적 가치가 크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의 고유한 것을 다소 소홀하게 여기던 시대에 조선시대의 공예품을 가치있게 여기는 모습이 참으로 고귀하다. 공예품의 진위는 사용하는 세월이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알 수 있듯이, 우리 성결교단의 유구하고 자랑스러운 전통과 신학도 119년차 총회를 앞두고 지금까지 찬란하게 유지하고 발전해 온 것처럼 그 진가가 드러나리라 본다.
“요즈음 전철역이나 큰 건물 입구에 보면 인조 꽃밭이나 인조 나무가 꽤 많습니다. 인조라고는 하지만 얼마나 실제와 똑같은지 거의 구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져보지 않고 눈으로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어요. 가만히 보면 실제 꽃밭이나 나무는 반드시 흠이 있고 병든 것이 끼어 있습니다. 병들고 흠이 있다는 것! 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확실한 증거겠지요?” 윤해영 작가님의 ‘흠’이라는 글이다.
이 글을 통해 서로에게 흠이 보이면 살아 있다는 명확한 증거로 믿듯이, 우리 교단도 작은 흠을 발견할 때 격렬하게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포용과 아량으로 넉넉하게 기다려주면 좋겠다.
만약 달항아리가 조금 기울고 미세한 금이 갔다고 다 부서버렸거나 공예품에 흠이 있다고 다 폐기했다면 지금 우리에게 조선의 값진 공예품과 국보급 도자가 얼마나 남아 있었을까?
이러한 문화유산을 지켜온 선인들의 지혜처럼 엄정한 신학 및 신앙의 영역에서도 얼핏 보기에 흠이 있다고 쉽게 간주하고 단정짓고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오래 품고 기다려주면 세월이 지나 풍성한 달항아리를 간직하게 되는 은총이 우리 교단과 교회에도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교단의 인적 자산과 신학적 자산을 소중하게 간직하면 좋겠다.
AI가 무한대로 활용되고 정보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인공지능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K-성결신학에 대한 고유하고 진귀한 가치와 품위가 더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우리 교단이 되길 소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