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고 싶은 소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 현관 오른쪽 벽면에는 예수님께서 양치는 모습을 묘사한 장엄한 화강암부조가 있다. 조각 밑에는 ‘증 홍기득 장로. 1979. 8. 9.’란 문구가 새겨져있다. 이 조각은 홍 장로가 교단을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한 예다.

홍기득 장로는 30여 년 동안 성결교회 역사와 함께하면서 교단을 발전시킨 공로자다. 홍 장로는 성결회관의 건축, ‘한국성결신문’ 창간과 운영, 교회개척, 작은교회 지원, 부흥대책기금 조성과 증식, 교단 각 기관 및 초교파 연합기관 활성화 등 성결교회를 이끈 중심적인 인물이다.

이렇듯 큰 일을 해온 홍 장로의 인생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살아온 가시밭 길이었다. 그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신분임을 깨달은 후부터는 교회와 교단과 한국교계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확고한 사명감으로 살았다. 그는 교단을 사랑하는 마음, 교단의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십자가도 사양하지 않고 짊어진 큰 일꾼이었다. 성결교회의 위상을 높였을 뿐 아니라 평신도지도자로서 폭넓게, 교파를 초월하여 많은 연합사업에도 참여하여 한국교회 전체의 성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가시밭의 백합화처럼 희생적으로 지순하게 헌신한 인물이었다.  

홍기득 장로는 1919년 9월 시흥군 신동면 양재리(현 강남구 양재동 69)에서 부친 홍봉 씨와 모친 정순이 씨의 일곱 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홍 장로의 아버지는 매우 엄격하여 그의 낯을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홍 장로는 그런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이 일곱 살이 되어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지만 농사꾼은 농사일만 알면 된다는 아버지의 생각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홍 장로는 공부가 하고 싶었다. 홍 장로의 어머니는 아주 학문이 높고 명필이어서 인근에 소문난 신사임당 같은 분이었다.

어린 홍 장로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의 주선으로 천신만고 끝에 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20여 리나 되었고 아버지에게 붙들려 일하느라고 학교를 빠지는 날이 더 많았다. 3학년까지 마치고 아버지의 끈질긴 반대로 결국 학교에 다니는 것을 그만둬야했다. 그러자 담임선생이 “사람은 짐승과 달라서 무슨 일이 있어도 배워야 된다. 내가 학비를 대줄 테니 나와 같이 우리 집에서 지내면서 학교를 다니도록 해라”며 교장 선생과 함께 보통학교 학비를 대주기로 하여 계속해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7년 만에 보통학교를 졸업했지만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홍기득 장로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농사꾼이 되었다. 그런데 농사일보다 견디기 어려운 일이 있었다. 바로 형과의 관계였다. 열한 살 차이가 나는 형은 하루를 멀다하고 홍 장로를 두들겨 팼다. 함께 일을 나가면 형은 언제나 홍 장로에게 모든 일을 맡겨놓고 노름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일이 끝날 때쯤 나타나서는 일을 그것밖에 못했느냐고 홍 장로의 몸에 멍이 들도록 매를 대었다.

형의 매를 견디다 못한 홍 장로는 헐레벌떡 집으로 뛰어 들어와 아예 죽어버릴 결심을 하고 산으로 올라가 목 매달아 죽으려고 했다. 그때 산 아래로 서울 가는 신작로가 보이면서 자가용과 자전거를 탄 사람이 분주히 오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동요되었다. “나라고 저런 차를 타고 다니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느냐? 집을 나가면 설마 죽기야하겠나?” 그는 서울로 탈출하는 길이 악마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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