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교회의 자유를 규제하고 박탈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교회의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역사성에 강하게 도전한다. 세속에 취한 19세기 이후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기적이란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는 철학적 가정을 했다. 이 때문에 시공을 초월한 성경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교회의 존재가 그들에게는 매우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역사의 현장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각종 이적은 골치 아픈 문제이다.
박동희에게 신유 사역은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는 신유의 은사를 구하지도 않았고 사모하지도 않았다. 아내(우춘자 전도사)의 사역을 도우며, 자신의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부득이한 상황에서 환자에게 기도할 때마다 신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하루는 유독 눈이 많이 오던 날 50대 가량의 중풍병자가 심방을 요청했다. 그 환자는 혀가 곶감처럼 말려들어가 목을 막는 바람에 거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 환자의 목에 박동희가 손을 대자 순식간에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되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박동희는 신유 사역을 위한 부르심에 순종하지 못하고 갈등했다.
박동희의 신유 이적은 서울교회(이계섭 목사)에서 교사로 헌신하면서 눈에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서울교회 집사 직분도, 교회학교 부장도 담임목사의 협박과 위협에 어거지로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맡으면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기질인지라, 부부의 헌신적인 기도와 전도, 학생들에 대한 사랑의 결과, 서울교회 학생부는 당시 최고의 성장과 부흥을 경험했다. 신유의 역사도 거기에 한몫했다.
당시 중등부 2학년을 맡고 있던 안혜정 선생이 있었다. 뜨거운 물에 데는 사고로 교회에 결석했다는 것을 알고 담당 전도사와 함께 심방을 갔다. 심방을 갔는데, 물에 데인 발이 물집으로 목불인견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묻자, 어머니가 나가면서 항상 연탄 아궁이를 닫아놓는 데, 그 날은 빨리 나가면서 연탄 아궁이를 닫지 못했고, 그것을 모르고 아궁이 위의 솥을 들었다가 너무 뜨거워 놓아버렸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양말에 살이 붙어 다 떨어져 하얀뼈가 다 보일 지경이었다.
박동희 집사가 손을 씻고 와서 손을 대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자 데인 곳에서 물이 줄줄 흐르면서 새로운 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녀의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야! 살이 올라온다."고 소리를 쳤다. 안 선생의 흉측했던 물집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고, 그 부위는 아기 피부처럼 깨끗했다.
이처럼 신유의 은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그때도 박동희 집사는 신유 사역을 안하려고 했다. 이전에도 누가 아프다고 하면 모르는 척하고 만지면서 기도하면 좋아졌다. 주변에서는 약손이라고 하는 소리도 들었다. 어지간 한 학생들은 그가 기도하면 나았다. 한번은 순복음교회 집사가 종기가 난 아이를 데리고 왔다. 손을 대자 종기가 마치 나무 뿌리가 뽑히는 것처럼 빨려 나왔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함께하심이 분명했지만, 선뜻 나서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회적 위신의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사업에 실패한 관계로 빚쟁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자격지심이 컸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곤 했다. “하나님, 제가 돌팔이 의사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여깁니까? 제발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습니까?” 그 와중에서 지인들 사이에서 이런 소문이 돌았다. “박동희 부인이 예수한테 미쳤다고 하더라. 그 사람이 정상이 아니라고 하더라.” 흔히 “~ 카더라” 전파가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박동희까지 함께 미쳤다”라는 소리까지 들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는 십자가의 길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의 프로그램 속에 있는 연단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누가 알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