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결국 사랑을 닮았다
사랑은 주고, 기다리며 견디는 일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가장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누구에게나 소중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며 행복한 하루를 기대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오늘은 행복했는가’를 자문합니다. 삶의 방향을 정할 때도, 무언가를 선택할 때도, 그 중심에는 늘 ‘행복’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바라고 구하는 행복은 정작 손에 잘 잡히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이루면, 어딘가에 도달하면, 누군가를 만나면 행복할 줄 알았지만, 그 순간에도 또 다른 결핍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묻습니다. 도대체 진짜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그 질문에 부활절이 하나의 길을 열어줍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한 분의 삶이 그 해답을 보여줍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사랑,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사랑, 끝내 외면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으신 사랑. 우리는 그 사랑이 부활이라는 기적으로 완성되는 과정을 기억하며,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이야기 속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피어났고, 가장 절망적인 자리에 가장 큰 희망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진짜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은 고통 너머에 사랑이 남았을 때, 비로소 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살아오며 마주한 ‘행복의 순간들’을 떠올려봅니다. 온 가족이 함께 식탁을 둘러앉던 평범한 저녁, 지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들어갔을 때 웃으며 맞아주는 아내와 아이들, ‘아빠가 제 아빠여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라는 딸의 생일 축하 편지, 친구 부부와의 행복한 동행, 성도님이 정성껏 챙겨주신 밑반찬. 화려한 순간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 사랑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순간들이 저를 울컥하게 했고,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은 곧 사랑입니다.
사랑은 무언가를 ‘주는’ 일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품고, 상처를 안고도 품어주는 것.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희생으로. 그래서 사랑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외롭고, 상처받고, 오해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그 안에 진짜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비워내는 일이지만, 그 속에 가장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부활절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떤 빛이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오늘 누구를 사랑하고 있나요? 당신의 삶에 사랑은 얼마나 머물고 있나요?”
또한 행복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으로 향할 때, 우리는 그 길 끝에서 진정한 웃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린도전서 13장 1절),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사랑이 없다면 공허합니다.
반대로 비록 부족한 삶일지라도,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곧 축복이 됩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관계들 안에 사랑이 다시 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용서하고, 이해하고, 함께 웃을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부활의 기쁨처럼 따뜻한 행복을 다시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행복은 결국 사랑을 닮았습니다. 사랑은 주는 일이고, 기다리는 일이며, 끝까지 견디고 품는 일입니다.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가장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2025년 부활절, 그 사랑을 다시 떠올리며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행복을 느껴보면 어떨까요?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랑하며 살아가 보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