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9년 프랑스 혁명. 로베스피에르는 “자유·평등”을 외치며 반대파 1만7천 명을 단두대로 보냈다. 2년 후, 그의 목도 같은 칼날 아래 떨어졌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이를 “인간의 완전성 추구가 초래한 불완전한 폭력”이라 분석했다. 21세기 한국 정치판에서 남발된 탄핵소추나 법을 비웃은 비상계엄은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는 정치의 비인간화를 노출시켰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배제의 늪은 가장 먼저 발을 디딘 자를 삼킨다”는 경고를 흘린 적이 있다.

▨… 2023년 메타(페이스북)는 특정 정치 성향 콘텐츠를 차단하는 알고리즘을 도입했다. 6개월 후 플랫폼 사용자는 38% 감소했고, EU는 “디지털 독재”라 규탄했다. 실리콘밸리 개발자들의 경고가 적중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코드 속 배제는 인간성의 배제로 귀결된다”며 이미 이를 예견했다. 그는 “기술이 신이 된 시대, 교회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선택해야 한다”(저항과 복종)고 일갈했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도 마치 예견이나 한 듯 “인간의 완전성 집착이 불완전한 폭력을 낳는다”고 지적했다.

▨… 거룩함을 외치며 이웃을 밀어낸 교회는, 결국 스스로를 추락시킨다. 거룩함과 속됨을 물과 기름처럼 나누는 교회는 정작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세상에서 배제된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배제의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하셨다.  역사가 증명하듯 모든 배제는 순환한다. 프랑스 혁명의 단두대도, 기업의 알고리즘도, 교회의 성벽도 결국 자신을 절단했다. 신학자 칼 바르트의 경고가 현실이 됐다. “교회가 세상을 심판하는 순간,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

▨… 묻는다. 과연 내가 차단한 자들의 자리에 서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십자가는 이 물음에 대답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44) 배제의 사슬을 끊는 일, 그것이 곧 십자가 복음의 실천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이 말씀을 “배제 체제의 종말 선언”이라 해석했다. 신학자 J. 몰트만도 『희망의 신학』에서 “십자가는 배제당한 자들과 함께 부활의 문을 여는 사건이다”이라고 말한다.  

▨… “가난한 자를 배제하는 자들은 영적 빈곤에 빠진다”는 테레사 수녀의 경고가 더 크게 울리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물으면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미소를 남모르게 감추는 이도 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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