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생명을 소유한 부활공동체의 마땅한 삶

조병재 목사.
조병재 목사.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주 의미 있는 경험을 하게 되면 그와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끼리 일종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인류역사가 경험한 모든 공동체 가운데서 가장 오랜 역사와 오랜 영향력을 가진 공동체에 대해 말하라면 단연 교회일 것입니다. 
복음서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까이 올수록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자꾸만 도망치고 급기야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뿔뿔이 흩어집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는 해체의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다시 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구원이며 유일한 소망이라고 목숨을 걸고 외치기 시작합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자마자 그들의 삶이 근본부터 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생에 대한 새로운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확실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어 초대교회라는 공동체를 세우게 됩니다. 

새 생명을 소유한 부활공동체
우리도 어느 날, 어떤 삶의 정황가운데 누군가를 통해서 또 어떤 계기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 즉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특권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새 생명과 함께 인생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토대로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를 이루는 각 지역교회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름지기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난 경험 위에 세워진 공동체로서, 한 마디로 새 생명을 소유한 부활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생명을 소유한 부활공동체로서의 우리의 마땅한 삶은 무엇일까요? 

승리를 보장받은 자의 감사의 삶을 사십시오
먼저, 승리를 보장받은 자의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인생 최대, 최후의 문제는 죽음입니다. 높은 지위와 권력을 얻고, 엄청난 부와 명성을 가진 어떤 인간도 죽음 앞에서는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실존적인 공포와 두려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장차 부활할 것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죽음을 ‘잠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잠은 잔다는 것은 깰 때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죽음은 잠자는 것이고, 부활은 깨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있는 두려움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이렇게 부활의 승리를 보장받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이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고전15:57).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받고 살고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영원히 감사할 존재임을 잊지 마십시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의 삶을 사십시오
또한 새 생명을 소유한 부활공동체로서의 삶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의 삶입니다. 
당시 고린도는 가장 번영했던 상업도시로, 번영한 만큼 죄가 많았습니다. 사치하고 음란이 넘치던 그런 도시였습니다. 이런 도시에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통해서 고린도교회가 탄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유혹이 너무 많아, 믿고 나서도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고린도라는 도시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있었고, 핍박을 받게 되자 성도들의 믿음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내적으로는 자신의 욕심을 통해서 오는 유혹에 흔들리고 있었고, 외적으로는 핍박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부활의 소망을 전하면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고전15:58)고 강조했습니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사명의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부활공동체로서의 우리의 삶은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사명의 삶입니다. 새 생명을 얻은 자로 부활공동체인 교회를 이룬 우리는 승리를 보장받은 자의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적극적으로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사명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일’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주의 일’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고전9:1). 
여기서 ‘주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바로 ‘주의 일’인데 바울은 그 ‘주의 일’이 바로 ‘너희’, 즉 고린도교회 성도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행한 ‘주의 일’은 고린도사람들을 전도하여 고린도교회라는 부활공동체에 소속되게 한 일입니다. 

전도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해서 그들의 믿음을 잘 잡아주고 그들이 성도다운 성도,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세워주는 일, 그것이 바울에게 있어서 ‘주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일’이란 단순히 어떤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한 번만 하고 끝나는 어떤 이벤트성 프로그램도 아니고, 과거에 했던 것으로 만족해서는 더 더욱 안되는, 항상 힘써야 하며, 세월이 갈수록 더욱 힘써야 하는, 실로 복음을 전하고, 또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책임지고 잘 세워주는 일, 바로 부활공동체인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당신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세 번 태어나야 비로소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는 세 번의 출생이 있다는 것이죠.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는 인간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육적 출생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거듭나는 영적 출생,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깨닫는 사명적 출생이 있다는 것인데, 이 사명적 출생을 해야지만 비로소 피조물된 인간으로서의 가치있고 보람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스위스의 사상가 칼 힐티(Carl Hilt, 1833~1909)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라고 말했고,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Kierkegaard, 1813~1855)는 그의 나이 22살 때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써놓았다고 합니다. “온 세계가 무너진다 해도, 내가 붙들고 살아야 할, 그리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명을 나는 찾아야 한다”. 

귀하고 복된 일을 찾으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사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사명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사명적 존재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사명을 위해 얼마나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믿은 우리가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삶이 예배가 되는 ‘매일 성도’
주일 예배에만 의존하는 Sunday Christian, 즉 ‘주일성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삶이 예배가 되는 Everyday Christian, ‘매일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제자로 설 수가 있고, 계속해서 새 생명을 낳는 부활공동체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쪼록 새 생명을 소유한 부활공동체로 다음세대를 세우고 미래를 살리며 하나님나라를 확장해가는 실로 이 시대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로 승리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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