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박동희의 꿈은 정치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1939년 8월 전남 고흥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6.25전쟁의 격동기 속에서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진학도 못 하고 5년 동안 농사일을 하며 보냈다. 그의 성품과 자질을 알고 있던 초등학교 교장 선생이 종종 찾아와 격려했다.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서점에 가서 책을 사서 공부해서 검정고시에 합격하면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 그 선생은 부친과 막역한 사이였다.

교장 선생의 격려와 권유에 힘을 얻어 그는 검정고시로 광주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 학교가 어느 수준인지 시골뜨기가 알 턱이 없었다. 그러나 “너는 광주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라는 선생의 말씀에 원서를 넣고 합격한 것이다. 당시 광주고등학교는 전라도 지역에서 수재들만 들어갈 수 있는 최고의 명문으로 꼽혔다.

고등학교 진학 후 박동희는 같은 고향 출신의 서민호 국회의원을 선망했다. 서 의원은 해방 후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를 거쳐 4선의 국회의원을 지냈고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자유당 시절에는 살해 위협 속에서도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냈다.

그 덕분에 전남 고흥은 한동안 ‘정치 일번지’로 주목받기도 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6.25전쟁 중에 발생한 사건으로, 고위 장교들이 1951년 1.4후퇴를 전후해 105일 동안 유령 인원을 조작하여 24억원 가량의 금품과 5만 2천 섬의 양곡을 부정처분하여 착복했다. 그로 인해 굶거나 추위로 혹은 병들어 죽은 자가 적게는 5만명에서, 많게는 9만 명까지 달하였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은 1951년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으로, 공비 소탕 명목으로 500여 명을 박산(朴山)에서 총살한 것이다. 정부와 군 당국은 이것들을 은폐하고자 했지만, 서민호 의원(국회조사위원단장) 등의 노력으로 그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것이다.

박동희는 자신도 서 의원처럼 정치를 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서울로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아 전액 장학생으로 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였고, 같은 대학원까지 마쳤다. 재학 중에는 4.19민주화운동의 여파 속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경찰서에서 구류되기도 했고, 학생회장에 출마했으나 당국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낙마하기도 했다. 격동과 시련의 시기였지만, 청운의 꿈이 있었기에 모질고 세찬 비바람을 견뎌낼 수 있었다.

졸업 후에는 조선대학교 교무처에서 근무하고 강의를 하며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서민호 의원의 부름을 받고 그의 보좌관으로 국회사무처에서 근무하며(1969-1972) 정치인으로서의 이력을 쌓기 시작했다. 정치계의 거목이었던 서 의원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 속에 그의 정치 인생은 순풍에 돛을 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1974년 서 의원이 타계하면서, 그의 인생에 생각지도 못했던 어려움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돈이 있어야 정치를 한다’라는 주변의 말을 듣고 탄광 사업에 손을 댄 것이다. 광업진흥공사에 근무하던 선배도 그의 결정에 도움이 되었다. 처음에는 사업이 잘되는 것 같았지만 뜻처럼 되지 않았고 크게 실패하고 말았다.

박동희는 정치인들 주변에서 안 해본 게 없었다. 화투도 좋아했고, 바둑도, 당구도 잘했다. 사업이 번창할 때는 접대의 명분으로, 사업이 안될 때는 화풀이와 신세 한탄의 명분으로 매일 노름하고 술을 마셨다. 아무리 장사라도 몸이 배겨날 턱이 없었다.

본래 그는 운동신경이 발달해서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여러 운동을 잘했다. 주먹을 쓰지 않았지만, 주먹 세계의 사람들도 그의 이름을 알아줄 정도였다. 그런 몸이 망가져 버린 것이다.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그 와중에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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