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는 설교, 살리는 설교

만약 설교하다가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면 어떨까? 설교자로서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싫은 최악의 장면일 것이다. 누군가의 설교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교회에서 듣게 될 비난은 차치하고서라도 다시는 설교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살리려고 설교했는데,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으니 어떻게 다시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놀랍게도 성경은 사도 바울이 설교하다가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이 누구인가? 세 번의 선교여행을 통해 많은 교회를 개척한 탁월한 목회자이자 아테네 아레오바고에서 소피스트들과 변론하고 법정에서 당당하고도 조리있게 참소자들을 논박하며 그 명성이 지중해 전역에 퍼진 명연설가가 아닌가! 그런데 그의 설교를 듣다가 사람이 죽고 만다. 그는 바로 유두고(행 20:7-12)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누가 문제인가? 바울이 문제인가? 유두고가 문제인가? 너무 길고 지루하게 설교해서 청중을 졸게 만든 바울이 문제인가 아니면 말씀을 들을 태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위험하게 창가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은 유두고가 문제인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 듣고 있었는데 혼자 그런 일을 겪은 것이니 유두고 탓이라고 할 수도 있고 여튼 결과적으로 청중을 졸게 만들어서 귀한 목숨을 잃게 만든 바울 탓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바울의 문제라고 한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후 10:10)고 불평한 것처럼 바울의 언어적 전달력이 떨어진 것이 문제였을까? 물론 그런 문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살펴 보면 더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난다. 

본문을 살펴보면 유두고가 떨어져 죽기 전 설교와 살아난 후 설교가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죽기 전에 바울이 설교한 방식을 본문은 강론(행 20:7, 9)이라고 표현한다. 강론으로 번역된 원어는 디아레고마이(διαλέγομαι)이다. 주로 변론하다, 논쟁하다, 증거를 가지고 논하다, 합리적으로 설명하다는 뜻의 단어이고,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쓰인 문맥도 그런 식의 용례를 보여준다. 반면 후반부에 바울의 설교는 이야기(행 20:11)라고 묘사된다. 

여기서 이야기를 뜻하는 헬라어 호밀레오는 상대를 두고 대화하는 것을 뜻한다. 즉, 바울이 유두고가 떨어져 죽기 전에는 치밀한 논리를 가지고 조목조목 증거를 대며 논증하는 식의 설교를 했다면, 유두고가 죽었다 살아난 후반부는 서로 대화하는 설교를 했다고 해석해볼 수 있겠다. 

둘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논증이 자신의 주장을 펴는 것이라면, 대화는 상대방과 소통하는 것이다. 논증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때론 논박도 필요하고, 논증도 필요하다. 그런데 그것이 자칫 피곤한 사람을 더 피곤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기를 쓰고 들으려는 사람조차도 나가 떨어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때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잠시 접어두고 상대의 낯빛을 살피고, 눈빛을 교환하고, 회중과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고별설교를 하던 바울은 드로아에서 아마도 전력을 다해 설교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하나라도 더 알려주길 원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말이 길어지고, 치밀한 논리를 따라가지 못하고 지친 청중들은 하나 둘 졸기 시작하고, 마침내 창가에 있던 유두고가 떨어져 죽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다행히 명민한 바울은 사태의 원인을 알아차리고 예전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설교했다. 자기가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꼼꼼하게 전달하는 대신 청중의 얼굴을 보고 그들이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낯을 살피며 대화하며 말씀을 전한 것이다.

우리의 설교는 죽이는 설교인가 살리는 설교인가? 문제가 있다면 새로운 방식으로 설교하라. 바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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