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의를 받았으면 실천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무신론자보다 위험하다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입는다. 개신교의 신앙의 원리는 ‘오직 성경만으로’, ‘오직 은혜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인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신자는 오직 믿음으로 칭의의 은혜를 입는다. 그때 얻는 의를 “딴 의” 혹은 “밖에서 온 의(alien righteousness)”라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틴 루터는 밖에서 온 의를 받은 신자는 그 의를 기초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얻는 “타당한 의”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이는 내가 미국 유학 중 게렛신학대학원 도서관에서 읽은 마틴 루터의 저서의 내용이다. 그 당시 나는 실로 큰 충격과 도전을 받았다). 만일 신자라고 주장하면서도 이 두 번째 의가 없다면, 루터는 단적으로 “그 혹은 그녀는 신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마가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막 12:29-30)을 새 계명으로 진술했다.
실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참믿음을 갖는 것(갈 5:6)이 신자의 신앙 목표다. “하나님은 없다”라고 주장하는 이론적 무신론자보다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의 실천 혹은 열매가 없는 실천적 무신론자가 더 위험하다.
아빌라의 성 테레사는 하나님과 연합한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섬기려고 세상에 나아가는 사랑을 관상적 사랑이라고 자신이 쓴 『영혼의 성』(Interior Castle)에서 설파했다.
참으로 거듭난 신자는 사랑의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롬 13:13, 갈3:25), 빛의 자녀(엡 5:8-9)로서 세상에서 빛을 드러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약2:26). 믿음의 열매가 없으면, 루터의 말대로 “그 혹은 그녀는 신자가 아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엡 5:8-9)이다. “나는 어질고 착한 사람이 되었는지?, 불의를 멀리하는 의로운 사람이 되었는지?,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람이 되었는지?” 면밀히 살펴볼 일이다. 퇴역한 로마 군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빌립보 지역의 교인들에게 “너희들은 이방인들이 보기에 천국 시민같이(답게) 생활하라(빌 1:27, 참고 3:29)고 한 바울의 언명에 오늘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대형 맘모스교회(주로 작은 교회는 애더퍼스 콤플렉스에 걸려 있다)를 지향하면서 쉬운 회개, 쉬운 믿음 혹은 값싼 믿음, 싸구려 은혜를 남발하는 강단을 청산하고, “케리그마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며 전적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세상에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을 뿌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어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참된 성도를 육성하는 일에 전념해야 하지 않을까?
성공신화, 번영신학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어떠한 불이익을 당해도, 어떤 고난을 당할지라도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성결한 성도, 성결한 교회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세울 일이다. 약 3.5%의 염도를 지닌 바닷물은 썩지도 않는데, 약 20%를 자랑하는 신자를 지닌 그리스도교가 세상의 부패를 막는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은 가슴 칠 일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을 뿐 아니라, 신자들이 세상을 좇기 위해 긴 행렬 가운데 서 있는 작금의 현실에 성령 하나님은 얼마나 슬퍼하실까?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모아 불에 태우실 심판 날이 도래하고 있다, 믿음으로 받는 칭의의 은혜와 구원의 완성을 위해 중보하시는(히 7:25)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로 얻는 보전의 은총의 변증법적 긴장 사이에서 늘 깨어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경건한 성도, 그들의 영혼을 위해 세상 명예와 권력, 이득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진정한 목회자를 오늘날 필요로 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성령님 오소서! 성령님 머무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