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

벌써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서 말없이 나와 시선이 마주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단감 하나! 제법 가을이 깊게 물든 어느 날 내 시선을 붙잡았다. 그는 교회당 옆 작은 화단에 심겨진 감나무의 유독 애처로워 보이는 나뭇가지에 간신히 매달려 어둠을 밝히는 달빛인양 노란 눈웃음을 뿌리고 있었다. 헐거워진 옷가지들을 하나씩 둘씩 벗어버리고 이제는 맨몸으로 시린 겨울을 기다려야 하는 나무와 함께 외로움을 절반씩 나누고 있는 그는 당당하고도 여유로웠다.

여름날 작렬하던 태양의 열기가 그의 초록빛 꿈을 살 속 깊이 노랗게 채색해 놓고야 말았겠지만, 원망의 몸부림은커녕 자신의 삶에 변화의 물꼬를 터 준 일이 오히려 고맙기 그지없다는 듯 연신 몸을 흔들어대고 있는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바람에 등 떠밀려 나무와 일찌감치 작별하고 발밑에 내려앉아 따뜻한 이불이 되어주는 낙엽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일까? 말없이 미소만 흩뿌리고 있었다. 시리도록 화사한 가을 미소를.
나를 바라보는 지긋한 그의 시선에 속내를 들켜버린 아이처럼 동동거리다 나는 차마 고개를 떨구고야 말았다. 여전히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해 좌충우돌하고 있는 나를 측은한 듯 바라보는 그 눈빛에.

2. 감(感)!

언제나처럼 나는 기도의 사다리를 통해 과거와 만나 악수하며 미래와도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전능자와의 만남과 대화는 대부분 오늘의 내 종아리를 세차게 때리는 회초리가 된다. 선명한, 혹은 처절한 흔적을 남기지만 ‘무늬가 되지 못한 얼룩’인 까닭에, 내 삶의 변화는 갓 돌을 넘긴 어린 아기의 걸음마보다 지지리 더디기만 하다.

하여, 나는 감(敢)히 감(感)을 잡아보려 애쓴다. ‘이런 나를 재촉하고 또 격려하라고 단감 하나 거기 남아있었던 걸까?’ ‘땅의 이치도 다 헤아리지 못하면서 하늘의 비밀을 모조리 알고 있다는 듯 서슬 시퍼렇게 외치는 내 모습을 보며, 허공에서 노란 웃음을 웃고 있었던 걸까?’

감히 감(感)을 잡으려는 몸부림에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을 말까?”하는 비관적 침묵이 아닌, ‘가장 위대한 웅변은 침묵’이라는 진부하지만 여전히 눈부신 금언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 단감 하나가 낙관적 침묵(感)으로 내게 말을 건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소통의 실패는 대화의 부재보다는 의미의 왜곡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태반인 까닭에, 감(感)을 잡으려는 내 몸짓은 서투르기 그지없어 그의 침묵(感)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만다.

하기는, 하릴없이 잡사(雜事)로 분주하여 ‘사유(思惟)의 여유(餘裕)’조차 망실한 자가 감(敢)히 감(感)을 잡으려는 시도조차 우스운 일이겠다. 침묵은 수많은 의미들의 총체인지라 찰나의 곁눈질이 아닌 ‘여유(餘裕)있는 사유(思惟)’로만 감(感) 잡을 수 있을 터이니까. 실로 우연한 시선의 마주침에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의 미소를 보았던 것은 단연코 필연이다.

3. 감(監)!

가을정취의 압권이요, 계절미(季節味)의 으뜸이라며 한 교우가 가져온 단감을 몇 개 받아들고서야 며칠 동안 잊고 있었던 교회당 옆의 그가 생각나 마음이 바빠졌다. 서둘러 그를 만나러 문을 나섰다. 아!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를 찾으려는 황망한 내 눈빛만이 수취인 불명으로 반송되어 돌아왔다. 괜스레 높은 하늘이 밉고, 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밉고, 그 하늘에 그려지는 얼굴들이 싫고, 그 하늘아래 서 있는 나도 싫어졌다.

아직 내 안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의 모습이 한 교우가 가져온 감 하나와 겹쳐지면서 나를 몹시 흔들었다. 예정된 이별이라면 당연히 미소를 준비하여야겠지만, 돌연한 헤어짐에는 아무런 준비도 대비도 없었던 까닭이다. 우연한 만남을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우연한 헤어짐에는 속수무책인 나의 삶, 또 우리네 삶.
아, 나는 언제나 만남에는 목말라 하고 헤어짐에는 쓰라림으로 동동거린다.

인생이란 실로 만남과 헤어짐의 이치를 온몸으로 새기는(監) 것이요, 신앙이란 그렇게 걸어가는 인생의 여정에서 마침내는 유쾌하면서도 산뜻한 만남과 헤어짐을 온 몸으로 살아내는 것일 터. 기실, 헤어짐이야말로 또 다른 만남에 충실 하라는 독촉장이라면, 누군가의 부재(不在)를 차라리 기뻐하며 나는 감(敢)히 또 다른 만남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늘을 그리워해야겠다.

그리고, 그래서, 오늘도 나는 가슴 떨림으로 오늘의 사람들을 만나야겠다. 이 가을이 지나기 전에 아직은 단감이 풍성히 매달려 있는 나목들을 만나러 가까운 산에라도 가야겠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