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을 설교할 것인가? 복음을 설교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독자들이 어떻게 답할지 궁금하다. 본문과 복음 둘 다 설교하면 되지, 뭐 복잡할 게 있냐고 할지 모르겠다. 혹은 본문을 설교하는 것이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고 복음을 설교하려면 본문을 설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간단해 보이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폴 윌슨이 말한 바와 같이 본문을 설교한다고 해서 반드시 복음을 설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의 의미는 충실히 설명하더라도 단순한 정보 전달에 그치는 경우도 있고, 설교자의 개인적인 해석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설교를 듣고 나서 청중들은 간혹 이 설교를 통해서 복음을 들었다고 말하기 애매한 느낌을 갖곤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에드워드 팔리를 비롯하여 폴 윌슨 및 브라이언 채플 등 설교학자들은 단순히 본문의 내용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설교(preaching the text)보다 복음 전달에 중점을 둔 설교(preaching the gospel)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우선성을 강조하며 본문 중심 설교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전통적인 강해설교학자들과 그 뒤를 이은 본문이 이끄는 설교(Text-Driven Preaching)를 주장하는 이들, 그리고 토마스 롱을 비롯한 신설교학의 뒤를 이은 본문 중심 설교학자들이다. 이들의 논쟁 속에서, 설교자는 본문과 복음, 이 둘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할까?

설교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과 일치해야 한다는 점에서 본문중심설교 혹은 성경적 설교를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의 본질인 복음을 증언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성경적 설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성경적이며 동시에 복음적이어야 한다. 문제는 복음을 설교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단순히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도돌이표 삼아 뻔한 결론을 무한 반복하는 설교나 청중이 듣기 좋은 소리(good news)를 복음으로 포장하는 설교, 혹은 화석화된 교리를 복음이라 말하며 개종을 강요하는 설교를 복음설교라 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설교란 성경 속에서 그리고 현실 속에서 실재하는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겪는 죄의 문제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주목하고 이 둘이 만들어내는 복음의 하모니를 들리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탁월한 연주자가 악기가 만들어 내는 소리에 민감한 것처럼, 복음설교자는 성경과 세상 속에서 울리는 죄의 소리와 은혜의 소리에 민감해야 한다. 죄를 단순히 교리적으로 접근해서는 그 파열음을 들을 수 없다. 숨쉬고 활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죄가 무슨 소리를 내는 지에 집중해야 한다. 충성된 파수꾼이 어둠 속 고요를 깨는 발자국 소리에 기민하게 반응하듯 설교자는 하나님의 세계 속 평화가 깨어질 때 나는 죄의 소리를 민감하게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난 아브람이 약속의 땅에서 기근을 만났을 때(창 12:10) 설교자는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이후 그의 불안이 어떻게 눈덩이처럼 커져 가는지를 보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고개를 돌려 현실을 보면 아브람같은 성도들과 마주친다. 믿음으로 살아가기로 결단하지만, 생존의 불안 속에서 성도들은 “먹고 살아야 하니” 신앙을 잠시 제쳐놓기도 한다. 이들에게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아브람이 그러다가 아내도 뺏기고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조심하라고 설교할 것인가? 아니면 아브람의 연약한 믿음을 질책하지 않으시고 그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며 살 길을 열어 주시려 일하고 계신다고 은혜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성경과 세상 속에서 죄의 문제를 폭로함과 동시에 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교하는 것, 그것이 폴 윌슨이 말하는 복음설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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