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0:17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눅20:17) 이 말씀은 기독교의 정수다. 

건축자들이 버렸다는 것은 거의 쓸모없는 돌이다. 이끼가 낄 정도로 방치된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상식에서 벗어나 버린 돌이 가장 요긴한 돌, 벽과 건물을 지탱해 주는 머릿돌로 사용되었다고 말씀한다. 이는 낯선 현상이요, 예수님은 이 특이성을 사용하여 세상과 하나님을 보게 하신다. 돌을 버린 세상, 머릿돌로 사용하신 하나님. 이를 통해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과 복음이 완성되었음을 이해시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비유의 결말로 하신 말씀이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가 오래 있다가 돌아왔다. 종을 보내어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였다. 당연한 요구다. 결과는 의외였다. 농부들은 소출은커녕 세 차례나 종들을 때리고 능욕하였다. 

오랜 세월 속에 땅이 자신들의 것인 양 착각했을까?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과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던지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다. 사랑하는 아들을 존대할 것으로 기대하며 보냈다. 하지만 농부들은 서로 의논하여 상속자이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며 그대로 실행하였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가? 하지만 예수님은 죽임당한 아들이 바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인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신비의 전환을 말씀하신다.

사도행전 4장에도 본문의 말씀이 나온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4:10, 11)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건축자의 버린 돌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생명을 앗아간 그 잔인함을 사용하여 죽음에 포로 된 자를 해방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오늘 본문은 시편 118편 22절의 인용구다. 그다음 말씀 23절이 그 해답을 제시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118: 23)

인간의 죄악으로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된 것은 하나님이 행하셨기에 가능했다. 그 일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일이기에 기이하다. 선으로 악을 이기신 하나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농부들이 유산을 빼앗기 위해 죽인 아들이 농부들과 포도원 주인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목제물이 되어 돌아오다니! 돌을 버린 농부들의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고, 또한 인간 즉 내 내면의 죄악을 보며 실패로 끝난 줄 알았는데,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다니?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서 나온 경륜이다. 이 신비와 역설이 기독교다. 나의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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