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급의 액수를 줄입시다!”
철옹성에 둘러싸인 은둔의 나라, 한반도의 빗장을 여는데 크게 기여했던 것 중의 하나가 의료선교이다. 의료선교는 열악한 환경에서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요즘도 종종 그렇지만 예전에는 장마철만 되면 한반도 곳곳은 홍수로 큰 난리를 겪었다. 특히 강이 인접한 지역에 위치한 도시나 마을의 피해는 더욱 컸다. 성천강 유역에 위치한 함흥도 예외는 아니었다. 폭우가 연이어 쏟아지는 장마철이면, 성천강의 강물은 어김없이 제방을 기어올라 흘러넘쳤고, 도시의 낮은 지대는 금방 물에 잠겨버렸다. 그럴 때면 물을 먹은 흙담집들은 맥없이 주저앉아 버렸고, 토양은 물살에 휩쓸려 비옥한 땅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수재민이 속출했고, 핍절한 살림살이는 더욱 궁핍해졌다.
홍수가 지나자 수많은 가정들이 구호를 받아야 했다. 한국교회와 선교부들은 구호물자를 구입해 피해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의료선교의 선봉에 서 있던 선교병원들은 이런 기후적 상황에 큰 영향을 받았다. 많은 환자들이 치료비를 낼 수 없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병원의 수입은 급감했다.
당시 함흥의 한 선교병원은 최소한의 경비로 운영되고 있었고, 여분의 수익으로는 가난한 환자들의 치료비를 보전하고 있었다. 따라서 치료비 수입이 감소했다는 것은 가난한 환자들을 진료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병원의 경비지불도 문제가 되었다. 병원 직원들의 급료는 겨우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최저 임금이었다. 더구나 직원들 가운데도 홍수로 피해를 본 사람들이 있었다.
병원 직원들이 이 문제의 타개책을 강구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대표가 망설이던 끝에 말을 꺼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환자들과 간호사들을 먹여야 하고, 의약품도 사야하는데…. 또 소독실, 세탁실을 써야 하고 직원들의 임금도 지불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참 어려운 형편입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봉급을 임시로 줄이거나 감원(減員)하는 것, 둘 중의 하나입니다. 누구 더 좋은 의견을 가진 분이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이야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직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누구도 두 가지 방법을 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절박한 상황이었다. 기존의 상태로는 병원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물론 가난한 환자들을 다 돌려보내고 받던 봉급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돈이 없고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환자들을 다 돌려보내는 것은 선교병원의 설립 취지와 목적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구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비상시국이 아닌가.
참으로 난처한 상황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때 한 직원이 “봉급의 액수를 줄입시다"라고 제안했고,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 결과, 선교병원은 어려움의 때를 이겨낼 수 있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상황은 호전되었고, 봉급의 액수도 예전 수준을 회복하게 되었다.
상생을 모색하며 허리끈을 졸라매는 헌신적 모습이 아름답지 않는가! 한국교회가 절대적 소수이면서도 한국사회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삶의 영역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삶의 터전이 경쟁적 무대만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생사(生死)만을 위한 투쟁의 장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실제적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상생과 공존을 위해 서로를 보듬고 함께 갈 수 있는 영역이 있는 법이다.
예수의 십자가 정신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예수께서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마 18:4)라고 하셨다. 그런데 자신의 허리끈을 좀 더 늘리기 위해 상생과 공존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대학등록금 반값 문제, 경쟁이 아니라 상생의 논리로 풀어간다면 그렇게 요원(遙遠)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