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서와 고금을 가릴 것 없이 권력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귀를 막고 눈을 가렸다. 백성들의 처지나 형편을 살피려 하지 않았고 그들의 호소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호랑이가 개를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은 날카로운 발톱과 강인한 어금니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기에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발톱과 어금니를 돌보는데만 힘을 쏟았다. 슬프게도 우리나라의 현대사도 이에서 어긋나지 않았다.

▨… 권력이란 무엇인가? 막스 베버(M.Weber)의 정의를 빌린다면, 상대방의 반대의지를 꺽고 힘을 가진 사람이 믿고 나갈 수 있는 개연성 그 영향력을 말한다. 이 정의를 알고 적용하는지 모르고 적용하는지는 모르지만 흔히 기독교계, 혹은 교단에는 사회적 통념으로서의 권력자는 없다는 로맨티시즘이 복음주의를 방패삼아 독버섯처럼 웅크리고 있다. 우리의 힘은 권력에 바탕한 것이 아니라 권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 그러나 권위란, 언제나 ‘그 결정이 옳다’라는 도덕적 기반 위에 있을 때라야만, 따르는 자가 동의하고 인정하는 면류관이다. 그만큼 도덕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기독교계나 교단의 지도자들의 권위도 이에서 조금도 다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셨으므로 권위는 나의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오만이다. 내가 옳은 결정을 내릴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께서는 나를 세우셨다는 이해가 모든 지도자에게 우선되어야 한다.

▨… 이점에서 모든 지도자들은, 자신을 비판하는 심지어는 부정하는 목소리에까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만 ‘옳은 결정’ 과정에서 생겨날 수도 있는 누수를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쿠제(H.Marcuse)는 부정과 비판정신이 사라져버린 사회를 일차원적 인간의 사회로 규정하며 그러한 일차원적 인간의 사회에서는 참된 의미의 사회정의는 이룩될 수 없다고 못박았었다.

▨… 교단의,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신을 향한 비판의 소리에 귀를 열 때 교단은, 교회는 바로 설 수 있고 지도자들의 권위는 빛을 발할 수 있다. 세상은 권력에 의해서 다스려지기도 하지만 교회는, 교단은 권위에 의해서만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지도력을 긍정한다. 교단과 개교회의 지도자들이 행여라도 권력자의 길을 가려하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런 자세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자의 수행 모습이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