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선교와 사역은 존 웨슬리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인디언 선교는 제대로 시작조차 못했고, 원치 않았던 영국인 교회의 목회 사역은 치정관계에 얽혀 법정에 고소당하면서 파국을 맞고 말았다.
영국으로 돌아오던 중 다시 태풍을 만난 웨슬리는 죽음의 공포에서 떨어야 했다. “나는 인디언들을 구원하기(to convert) 위해 아메리카로 갔다. 오! 그러나 누가 나를 구원할 것인가? 이 불신앙의 악한 마음에서 나를 건져줄 자가 누구인가? 나는 맑은 여름종교를 갖고 있다. 나는 말은 잘한다. 아니 위험이 없을 때에는 나 자신을 믿고 산다. 그러나 죽음의 위험이 가까이 올 때에는 나의 마음은 공포에 빠진다. 오호라! 누가 나를 이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할 것인가?”(1738년 1월 24일 일기)
그의 조지아 사역은 분명 실패였다. 하지만 그 여정을 통해 존 웨슬리는 자신과 인간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도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모라비아교도들과의 만남은 이후 웨슬리의 복음적 회심과 위대한 부흥운동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올더스게이트 체험(1738.5.24) 3주 후 존 웨슬리는 많은 배움을 위해 독일 헤른후트(Herrnhut)에 있는 모라비아교의 본산을 방문하게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웨슬리는 전에 피터 뵐러에 의해 설립된 페터레인 신도회(Fetterlane Society)와 기쁨으로 재결합했다. 이 신도회는 웨슬리가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는 이 신도회를 매우 사랑하였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 신도회 회원들은 영적으로 건실하게 성장하고 회원 상호 간의 교제가 깊어지면서 모일 때마다 신앙이 불붙는 것처럼 부흥하였다.
조지 휫필드는 그때의 전반적인 영적인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때로는 기도로 밤을 꼬박 세울 때도 있었다. 우리는 마치 새 포도주로 채워지는 듯한 느낌을 자주 받았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압도되어 ‘하나님이 참으로 땅위에서 인간과 함께 거하시도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라고 외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1739년 1월 1일 정기 애찬모임은 더욱 특별했다. 회원 60여 명이 참여했던 이 모임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임했다. 그 은혜가 얼마나 충만했는지 다음날 새벽 3시까지 계속되었다. 웨슬리는 애찬모임에서 일어났던 거룩하고 놀라운 신비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새벽 3시경, 기도를 계속하고 있는 순간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강하게 임했다. 많은 사람들이 넘치는 기쁨으로 소리쳤고, 또 많은 이들이 바닥에 넘어졌다. 하나님의 엄위하신 임재, 그 경외감과 놀라움에 휩싸여있다가 정신이 들자 우리는 한 목소리로 외쳤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이 주님이심을 인정합니다!”(1739년 1월 1일 일기)
이날의 광경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힘써 기도하던 120명의 신자들에게 임했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방불하게 했다. 이는 메소디스트들의 첫 오순절이었다. 성령세례가 베풀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신 것이다. 1월 7일의 애찬모임에도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임했다. 이 체험은 1739년을 하나님이 어떻게 운영하실지를 보여주는 예언과 같았다. 특히 이것은 존 웨슬리와 휫필드가 막 시작하려는 엄청난 일을 위한 영광스러운 준비였다. 그래서 엄청난 헌신과 격렬한 반대, 또한 무한한 은혜와 수 많은 사람들의 회심 등 메소디스트의 원형을 구형하는 획기적인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 수 있었다.
웨슬리에게 임한 성령의 신비로운 역사는 그에게 새로운 믿음의 세계를 보여주었고, 자연주의 종교에 강하게 대항하며 동시에 포용해야 할 것을 포용할 수 있도록 그의 시야와 지평을 넓혀주었다. 그는 이후 메소디스트 부흥운동에서도 이처럼 신비한 성령의 역사를 수없이 경험하였다. 특히 존 웨슬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마치 생기가 사방에서 불어와 마른 뼈가 살아나듯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다. <끝>
